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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81화
PAYLUA ORIGINAL · 제81화

81화. 내일을 청구하는 금고

빚을 먹는 금고 · 2,734자

오프라인 책장
정우빈은 그 사진을 다섯 번째 확대하면서도 역 이름보다 먼저 어머니의 신발을 떠올렸다. 이명숙은 무릎이 아픈 날이면 왼쪽 구두 뒤축을 조금 끌었다. 사진 속 환승 통로는 서람중앙역이었다. 어머니가 재활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올 때 반드시 지나가는 곳. 노란 안내선 옆으로 많은 사람이 걸어갔고, 사진 아래에는 내일 오후 여섯 시라는 시각이 인쇄돼 있었다. [원본 00 / 손실 사전 인식] [예정 시각: 18:00] [책임 후보: 미등록] [채권 매수 신청: 3건] “사고가 나기도 전에 산다고요?” 소라가 전화기 너머에서 물었다. “누군가는 벌써 가격을 붙였대요.” 우빈이 답한 뒤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전날 결제를 막고 집에 돌아와 겨우 잠을 잤다. 어머니가 빨아 놓은 이불에서는 햇볕 냄새가 났다. 그런데 이제 그 평범한 귀갓길이 서류 한 장에 적혀 있었다. 우빈은 곧바로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사정을 다 설명하면 치료를 취소하겠다고 하실 것 같았다. 그렇다고 위험을 숨길 수도 없었다. “엄마, 내일 병원 갈 때 환승역 쪽에 안전 점검이 있을 수 있대. 교통 안내 먼저 확인하고, 불편하면 내가 모시러 갈게.” “네가 병원을 따라다니면 회사 일은 언제 하니?” “중요한 일이야.” “그러니까 네 일이나 하라는 거야. 나는 내 발로 다닐 수 있어.” 늘 듣던 말투였다. 우빈은 안심하면서도 속이 쓰렸다. 어머니가 무심한 것이 아니었다.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짐이 되는 걸 오래 견뎌 온 사람의 말투였다. “그래도 내일 상황은 달라. 정확히 확인해서 다시 말씀드릴게.” 그는 전화를 끊고 박현정에게 사진과 접수번호를 보냈다. 현정은 곧바로 관할 역사 운영기관의 안전 담당자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자료의 출처가 불분명하다고 해도 예정된 위험을 제보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사고가 확정됐다’는 식으로 퍼뜨려 사람들을 몰아넣는 것은 피해야 했다. 세 시간 뒤, 우빈과 소라는 서람중앙역의 운영실을 방문했다. 지하 통로 입구에는 늦은 점심을 먹고 돌아가는 직장인들이 흘러갔다. 안내 방송, 개찰구 소리, 빵집에서 나는 버터 냄새. 그곳에는 내일의 재난 같은 것이 걸려 있지 않았다. 운영실에서 만난 조은채는 짧게 자른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자료를 읽었다. 역 시설 안전 업무를 맡은 지 아홉 해가 됐다는 여자였다. “이 사진이 실제 현장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사고가 날 거라는 말은 증거가 아니에요. 우선 점검 가능한 위험 요소가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저희도 예언을 믿어 달라는 게 아닙니다.” 소라가 말했다. “저 문서가 어떻게 작성됐고 누가 구매를 신청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은채는 눈을 들었다. “사고를 누가 샀다는 겁니까?” 우빈이 원본 00 문서의 네 번째 줄을 보여 주었다. 은채는 날짜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자신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운영 자료 목록을 적었다. 시설 점검 기록, 민원 접수 내역, 해당 시간대의 임시 운영 변경 예정. 그 목록은 금고가 만든 신비한 문장과 달리 아주 평범했다. 운영실을 나서려는데 우빈의 휴대전화 화면이 저절로 켜졌다. [예방 조치 선등록 가능] [책임 후보자 1명 등록 시 손실 보장] [추천 후보: 조은채] 우빈은 화면을 가렸다. 조금 전에 이름을 들었을 뿐인 은채가 벌써 후보에 올랐다. “왜 그래요?” 소라가 물었다. “금고가 안전을 지키는 사람부터 찾아냈어요.” 그는 휴대전화를 끄지 않았다. 대신 그 화면이 뜬 시각과 자신이 어떠한 입력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었다. 누가 무슨 일을 했는지부터 남기기로 했던 약속 때문이었다. 조은채가 문을 닫으려다 한 번 돌아섰다. “지난달에도 이런 이상한 민원이 있었어요. 아무 사고도 없는 날인데 ‘예정된 손실을 막기 위해 먼저 서명하라’는 팩스가 왔거든요. 서류에는 실제 역 이름도 없어서 장난인 줄 알았죠.” “보관해 두셨나요?” 우빈이 물었다. “팩스 수신 기록은 남겼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누가 보냈는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사후에 누가 같은 종이를 들고 나타난다고 해도, 그 사람이 발송했다는 근거는 아니죠.” 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채가 확인한 정보는 많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일의 사진이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작은 단서를 얻었다. 건물 바깥에서 새로 붙인 안내문이 바람에 흔들렸다. '안전 점검 중입니다.' 그 짧은 문장에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넘긴다는 말이 없었다. “저희가 할 일도 이 정도일 거예요.” 은채가 말했다. “위험하면 점검하고 알리고, 피해가 생기면 확인하는 것. 그보다 앞서 사람 이름부터 적으라는 서류는 믿지 않겠습니다.” 역 밖으로 나오자 비가 시작됐다. 건너편에서 우산을 펼치는 사람들 사이로 검은 장갑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우빈은 뒤따르려다 멈췄다. 장갑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달려가 봐야 또 다른 미확인 이름만 얻게 될 터였다. 바로 그때 새 통지가 떴다. [원본 00 / 위험 발생 확률: 91%] [예방 담당자 미지정 시 보증금 자동 청구] “위험을 막으려면,” 소라가 화면을 읽었다. “누군가 먼저 빚을 져야 한다는 거네요.” 우빈은 환승역 입구를 돌아봤다. 엄마가 내일 저 계단을 내려온다. 그는 한 사람을 보호하겠다는 마음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책임자로 만드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담당자가 없어도 해야 할 점검은 하게 만들 겁니다. 이건 계약이 아니라 안전 문제니까요.” 빗물 위로 붉은 숫자가 번졌다. 구경꾼의 발에 밟힌 숫자들은 흩어지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예정 시각까지 29: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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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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