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시간은 십구 분이었다.
우빈은 장부 맨 아래의 빈칸을 바라봤다. 그곳엔 도장도 이름도 없었다. 금고와 싸운 날부터 그가 가장 미워했던 것이 바로 빈칸이었다. 누군가 그 안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고, 이름을 찾아 적으면 모든 일이 끝난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빈칸이 증명하는 사실은 반대였다.
“실수령자를 확인하지 않은 기록이죠.” 소라가 말했다. “그게 가장 중요한 원본이에요.”
장갑 낀 형상이 웃었다. 얼굴을 덮은 영수증 바퀴가 빠르게 돌았다.
“빈칸에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에 값이 매겨진 것입니다.”
“아니.” 우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 빈칸엔 누구도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는 망치를 들어 장부를 치려다가 손을 멈췄다. 장부를 찢으면 거래소가 기다리던 ‘원본 훼손’이라는 핑계를 얻게 될지도 몰랐다. 백재헌의 잘못도, 장갑 낀 사람이 한 일도 또다시 누군가의 책임으로 바뀔 수 있었다.
대신 우빈은 박현정에게 물었다.
“실제 지급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디에 어떻게 남겨야 다른 기관에서도 확인할 수 있나요?”
“우리가 확인한 문서번호와 검증 상태를 각 기관에 통보할 수 있습니다. 당장 모든 거래가 무효가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이 기록을 수령 완료로 그대로 인용하면 모순이 생기죠.”
“그럼 그걸 먼저 해 주세요.”
송윤희가 원본 02의 보류 기록을 확인했다. 지연은 거래소로부터 받은 결제 설명서의 기초 자산 번호를 낭독했다. 서강재는 자신이 처리했던 회수 통지 가운데, 실제 수령 근거 없이 자동 생성된 건들을 따로 분류했다. 박현정은 모든 발언의 출처와 접수 시각을 남겼다.
[원본 02 / 실제 수령 확인 없음]
[원본 07 / 최종 수취 확정 취소]
[기초 자산 00017 / 대체 가족 등록 오류 확인]
모니터의 붉은 글씨가 한 줄씩 회색으로 바뀌었다. 장갑 낀 형상의 바퀴가 잠깐 멈췄다.
“이것은 결제를 막지 못합니다.”
“맞아요.” 소라가 말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범위도 알아요. 그래서 수령 근거를 내놓으라는 겁니다. 당신들은 아직 못 내놓았죠.”
결제까지 열한 분.
형상은 책상에 손바닥을 내리쳤다. 바닥에 있던 종이들이 일제히 솟았다. 우빈의 손목에, 서강재의 목에, 지연의 발목에 서로 다른 계약서가 감겼다. 종이마다 과거의 실수가 적혀 있었다.
[정우빈: 금고 최초 사용]
[서강재: 회수 통지 발송]
[한지연: 거래 검토 승인]
“여기에 잘못이 없는 사람은 없다!” 형상이 소리쳤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든 책임을 넘길 수 있다!”
지연이 이를 악물었다.
“내 잘못이 있는 건 맞아. 검토 번호를 찍었어. 조사받을게.”
서강재가 손목에 감긴 종이를 움켜쥐었다.
“나도 회수 독촉한 사실을 말할 거야. 그런데 내가 독촉했다고, 있지도 않은 돈을 너희가 팔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지.”
우빈은 아버지의 망치를 바닥에 세웠다.
“내가 금고를 썼어. 우리 가족 빚이 사라진다고 좋아했지. 그 뒤에 괴물도 봤고 피해자들도 봤어. 그건 지울 수 없어.”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래도 내가 누군가의 가족인지, 누군가 대신 뭘 받았는지까지 당신들이 정할 순 없어.”
종이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러나 사람들의 몸에 남은 것은 이름표가 아니라 각자의 말이었다. 형상은 그것을 하나의 장부로 합치지 못했다.
결제까지 일곱 분.
그들은 별도로 기록된 번호와 검증된 지급대장의 불일치 목록을 다시 보냈다. 금고를 보는 누구도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 대신 접수번호가 회신될 때마다 지연이 읽고 송윤희가 적었다. 하나가 끝나면 다음 번호로 넘어갔다. 아무런 기적도 없었고 속도가 빠르지도 않았다.
우빈은 그 느린 과정을 지켜보며, 첫날 금고 앞에서 느꼈던 달콤한 속도를 떠올렸다. 빚이 사라지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몇 초 안에 누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스무 해가 지나도록 밝혀지지 않았다. 빠르다는 이유로 옳다고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 있었다.
그때 회의실 전화가 울렸다. 박현정이 스피커를 켰다. 시립 자료관에 접수된 정해원 본인 확인 절차가 끝났다는 연락이었다. 독립적인 신원 대조와 본인 의사 확인이 이루어졌고, 당사자가 짧은 진술을 제출했다는 설명이었다.
우빈은 전화를 빼앗지 않았다. 이미 누군가의 이름으로 된 권한을 찾으려다 수많은 일이 틀어졌다. 이번에는 정해원이 어떤 이야기를 직접 남겼는지 들으려 했다.
박현정이 진술 중 공개에 동의한 부분을 읽었다.
‘나는 타인의 수령을 승인하지 않았다. 나를 대신한 서명에 동의한 적도 없다. 미수령 항목을 타인의 채무로 바꾸는 데 내 이름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
장갑 낀 형상의 오른손에서 검은 천이 벗겨졌다. 그 안에는 손이 없었다. 구겨진 계약서가 둥글게 말려 있을 뿐이었다.
[권한 체인 검증 실패]
[BJH-06 / 위임 성립 근거 부족]
“그래도 매매는—” 형상이 말을 이으려 했다.
“그럼 팔려고 한 사람이 무엇을 소유했는지 보여 줘요.” 소라가 말했다.
형상은 입을 벌렸지만 종이 바퀴가 돌지 않았다. 거래소 화면에는 ‘기초 자산 증빙 대기’라는 문장만 깜박였다.
마침내 결제 예정 시각이 지나갔다.
[기초 자산 00017 / 결제 보류]
[수취 대행 조합 / 소유권 이전 미완료]
[원본 02, 07 / 재확인 절차 이관]
회의실의 불이 다시 밝아졌다. 손목의 계약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장갑 낀 형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남은 종이들은 벽을 타고 회색 먼지처럼 흘렀다.
“끝난 건가요?” 지연이 물었다.
“이번 거래는 멈췄어요.” 박현정이 답했다. “거래소가 더 이상 누구에게도 허위 청구를 못 한다는 보장은 없어요. 외부 기관 정정도 계속 확인해야 합니다.”
우빈은 가방에 망치를 넣었다. 긴장감이 풀리자 무릎이 잠깐 흔들렸다. 소라가 종이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그녀 손가락에도 작은 잉크 자국이 있었다.
“오늘만큼은 일단 밥부터 먹읍시다.” 우빈이 말했다.
“말이 되네요.” 소라가 웃었다. “이제 좀 사람이 됐어요.”
그들은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기록관리원 밖으로 나왔다. 소라의 휴대전화에는 이정민이 보낸 메시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재활 프로그램을 마친 뒤 시장에서 쑥떡을 샀다는 사진이었다. 오랜 실종과 기록의 싸움 끝에 되찾은 평범한 하루가 화면 안에 있었다.
우빈은 이명숙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엄마. 오늘은 집에 가서 잘게요.”
“그래. 이불 빨아 놓았다. 너희 아버지도 아침부터 나무 손잡이만 들여다보고 있어.”
우빈은 전화를 끊고 하늘을 봤다. 비가 그치고 있었다. 그날 밤 처음으로 금고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회수 통지 오류를 인정하고 다시 확인하겠다는 세 기관의 답변이 들어왔다. 아직 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에게 바로 지급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의가 들어왔다는 기록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최미정의 유품 수령과 신영미의 증언도 별도 절차로 보호되고 있었다.
지연은 거래소의 본계약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검토 과정에 대한 사실관계를 제출하기로 했다. 서강재는 오래전 자신이 보낸 회수 통지 가운데 재검증이 필요한 사건을 찾아 피해자 연락처가 함부로 퍼지지 않는 방식으로 정리했다. 둘이 저지른 실수를 다 지울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앞으로 무엇을 할지는 남아 있었다.
우빈은 잠깐 집에 들러 정태수와 마주 앉았다. 태수는 말없이 망치 손잡이를 다시 고정해 주었다.
“아버지, 이제 이 망치로 금고를 부술 일은 없겠죠?”
“그건 나도 모르지.” 태수가 웃었다. “그런데 문을 열 때 쓰는 공구가 꼭 망치만 있는 건 아니야.”
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점심 무렵, 박현정에게 새로운 보존 요청이 접수됐다. 새벽자산유통의 결제 장부와는 전혀 다른 문서였다. 발신 기관은 폐업한 것으로 알려진 실험동의 이름을 쓰고 있었다.
[원본 00 / 사고 예고 등록]
[자산명: 아직 발생하지 않은 손실]
[예정 시각: 내일 오후 6시]
[사고 책임 후보: 미등록]
첨부된 사진에는 낡은 지하철 환승 통로가 찍혀 있었다. 출근길 사람들 사이로 노란 안전선이 길게 이어졌다. 사진 아래에는 빨간 도장 하나가 찍혀 있었다.
‘사고가 나기 전에 책임자를 정해 둡니다.’
우빈은 사진의 역명을 알아봤다. 어머니가 매주 치료를 받으러 갈 때 지나가는 환승역이었다.
그는 소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빚이 생긴 뒤가 아니에요.”
“무슨 말이에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팔려 하고 있어요.”
창밖에서 환승역을 통과하는 전철의 긴 마찰음이 울렸다.
지금까지 금고는 사람들의 과거를 훔쳤다. 다음 금고는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가격을 붙이려 하고 있었다.
제8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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