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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79화
PAYLUA ORIGINAL · 제79화

79화. 도장을 찍지 않은 사람

빚을 먹는 금고 · 3,245자

오프라인 책장
결제까지 사십팔 분. 새벽자산유통의 거래 화면은 도망치듯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매입 완료 예정’이었던 문장은 ‘기술 검증 진행’으로 바뀌었고, 그 아래에서 거래 시각이 초 단위로 줄어들었다. 정해원의 이의 신청은 여전히 신원 확인 중이었다. “우리가 장부를 찾았는데도요?” 우빈이 물었다. “거래소에선 아직 장부 내용을 검증하지 않았으니까요.” 지연이 답했다. “그래서 자기들한테 유리한 도장부터 쓰려는 거죠.” 그들은 시립 기록관리원에서 열린 긴급 자료 대조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자리에는 박현정, 송윤희, 기록관리원 담당자, 피해자 상담 담당자가 있었다. 이 회의가 거래소를 법적으로 즉시 폐쇄할 수 있는 절차는 아니었다. 다만 어느 원본에 어떤 오류가 확인됐고, 어떤 기관에 정정을 요구했는지 남기는 공식 과정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둘입니다.” 소라가 말했다. “원본 02와 07에 수령 사실을 확정할 근거가 없다는 기록, 그리고 거래소가 그 사실을 통보받았다는 증거.” 서강재는 자신의 퇴사 직전 접수번호가 찍힌 통지문을 내밀었다. 한지연은 검토 권한으로 받은 거래설명서와 실제 지급 확인 대장의 번호를 대조한 표를 제출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업무 중 알게 된 정보를 어떤 권한과 범위에서 확보했는지 설명했다. “그런데 왜 이제야 말했습니까?” 담당자가 물었다. 지연은 물컵을 내려놓았다. “상자가 어디로 갔는지만 봤어요. 상자를 누가 받았는지는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잘못도 기록해 주세요.” 서강재가 뒤이어 말했다. “저는 회수 대상자한테 서류가 있다는 이유로 압박을 했습니다. 그 서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확인하지 않았어요.” 어떤 고백도 장부의 숫자를 지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숫자가 사람을 대신 말하게 만든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때 송윤희가 작은 편지를 꺼냈다. 열일곱 번째 미수령 아동에게 보내기로 했던 편지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문서 겉에 적힌 문장만 보여 주었다. ‘수령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 확인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 “정해원 씨가 보낸 편지 사본과 문구가 같습니다. 본인이 직접 작성했는지는 검증 중이지만, 이 문장은 우리 기록소의 오래된 업무 규정에도 있어요.” 소라는 그 문장을 읽었다. 누가 말했는지 모르는 원칙은 다른 사람이 쉽게 가져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지켜져야 했던 절차가 장부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알려 주었다. 박현정은 거래소에 자료 보존 및 정정 요구 통지를 발송했고, 수신 확인번호가 돌아온 시각을 적었다. 17시 40분. 결제까지 삼십이 분. 거래소 화면이 일렁였다. [기초 자산 진실성 분쟁 접수] [결제 승인 권한: BJH-06] [승인 대리인 호출] 순간 회의실의 그림자가 한쪽 벽으로 몰렸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장갑을 낀 사람이 들어왔다. 얼굴에는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정확히는 얼굴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 모습을 기억하기가 어려웠다. 우빈이 눈을 깜박이는 사이 턱의 모양이 바뀌고, 뒤이어 목소리도 달라졌다. “승인할까요?” “누구냐고 물어봐도 소용없겠죠.” 우빈이 말했다. “저는 그 질문에 답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누가 설계했습니까?” 장갑 낀 사람이 책상 위에 두꺼운 장부를 내려놓았다. “권한자는 백재헌. 위임자는 정해원. 전달자는 정태수. 필요한 서명은 이미 모두 확보돼 있습니다.” “그들 모두 지금 당장 동의하지 않았는데요?” 소라가 물었다. “과거의 동의는 소멸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바닥에서 가느다란 종이 팔들이 솟았다. 서강재가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발목이 묶였다. 지연은 거래소 단말기를 닫으려다 손바닥이 책상에 들러붙는 걸 느꼈다. 회의실 밖 사람들에게는 그저 두 사람이 갑자기 움직이지 못하는 듯 보였을 것이다. 우빈이 장부를 향해 말했다. “백재헌 씨에게 전화해요.” 박현정이 곧바로 연락했다. 백재헌은 조사 담당자와 함께 대기 중이었다. 스피커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대리 서명 권한을 만든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해원의 동의를 받은 적 없습니다. 그 권한을 넘길 수 있다고 한 제 결정부터 잘못됐습니다.” 장갑 낀 형상의 오른손이 잠깐 흔들렸다. “그래서 백재헌이 전부 책임지면 됩니까?” 형상이 물었다. “아니요.” 우빈이 대답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 한 일을 책임져야죠. 없었던 수령을 있었다고 만들거나 남의 동의까지 대신 쓸 수는 없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정태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아들 부탁으로 그 자리에 온 게 아니라, 자기 이름이 적힌 위임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 공식 진술을 제출한 상태였다. “나는 1998년에 장갑을 건네줬다. 도장을 찍는 권한은 건네준 적 없다.” 형상의 얼굴에 첫 번째 균열이 생겼다. 그러나 장부는 사라지지 않았다. [정해원 권한 확인 필요] [대체 승인 가능 인원: 1] 지연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박현정은 회의실의 여러 사람을 둘러봤다. 금고를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생겼다. 담당자 한 명은 모니터의 글자 일부만 읽을 수 있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했다. “제가 본 것만 기록하면 됩니다.” 담당자가 말했다. “그 밖의 일은 각자 자신의 진술로 남겨 주세요.” 소라는 그 말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느꼈다. 모든 사람이 같은 괴물을 봤다고 거짓말할 필요가 없었다. 누가 언제 어떤 계약번호와 통지 내용을 확인했는지, 다른 사람의 목격과 나란히 남겨 두면 됐다. 형상은 하나의 대답만 원했지만 방 안에는 서로 다른 사실들이 있었다. “그 마지막 한 명이 누구죠?” 형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우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승인자 후보: 정우빈] [원본 책임 승계: 20초 내 동의 요청] 우빈은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망치의 나무 손잡이에 오래전 아버지가 파 놓은 홈이 손바닥을 눌렀다. 자신을 붙잡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는 망치를 내려놓았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결정할 권리까지 가진 건 아닙니다.” 형상이 입을 벌렸다. 안쪽에는 혀가 아니라 영수증을 출력하는 작은 바퀴들이 있었다. “그럼 결제는 진행됩니다.” 화면에 남은 시간이 나타났다. [00:19:59] 소라가 말했다. “우빈 씨. 마지막 서명 한 사람을 찾으려면,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본 게 뭔지부터 봐야 해요.” 그녀는 장부의 맨 아래, 도장이 하나도 찍혀 있지 않은 칸을 가리켰다. 빈칸 옆에는 작게 ‘실수령자 대면 확인’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애초에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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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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