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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76화
PAYLUA ORIGINAL · 제76화

76화. 장갑의 안쪽

빚을 먹는 금고 · 2,653자

오프라인 책장
정태수는 우빈이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보일러실 문을 열었다. “그 얘긴 여기서 하자.” 보일러실은 집 뒤편에 붙은 작은 공간이었다. 기름때 묻은 공구함과 낡은 목장갑들이 선반에 걸려 있었다. 어릴 때 우빈이 이 방에 들어오면 아버지는 꼭 문턱에서 신발을 벗으라고 했다. 못 하나가 발바닥을 찌를 수 있다는 이유였다. “장갑을 건네줬다는 여자가 누구예요?” “차윤서라는 이름은 그 당시엔 못 들었어. 우리가 부르던 이름은 윤 선임이었지. 스물몇 살이었어.” 태수는 선반에서 색이 바랜 사진을 꺼냈다. 1998년 사고기록 실험동 앞에서 여섯 사람이 서 있었다. 도기철, 젊은 백재헌, 태수, 그리고 얼굴을 돌린 여자. 여자는 장갑을 한 짝만 끼고 있었다. “왜 장갑이 한 짝이에요?” “오른손만 기록을 만져야 했거든. 원래는 사람 이름을 남기는 데 쓰면 안 됐어. 봉투와 봉인 장치에 손자국이 묻지 않도록 만든 거야. 그 안에 있던 서류엔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보호를 위한 물건이었네요.” “처음에는.” 태수는 손가락으로 사진 아래쪽을 가리켰다. 콘크리트 바닥에는 작은 흰 상자가 있었다. BJH-06이라는 숫자가 붙어 있었다. “여섯 번째 자리는 기록을 전달하는 사람이었어. 이름을 복사해서 쓰는 권한은 없었지. 그런데 백재헌이 도장을 늘린 뒤부터 그 자리에 서명 권한이 생겼어. 윤 선임은 그걸 막아야 한다고 했고.” “그럼 윤 선임은 우리 편이었어요?”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도 쉽게 못 해. 나중엔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결정하게 됐고,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나는 몰라. 내 손으로 건넸던 건 장갑 한 켤레가 전부야.” “그 여자가 반대했는데 왜 계속했어요?” 우빈이 물었다. 태수는 오래 말이 없었다. 보일러가 켜졌다 꺼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때 나는 금고 문만 잘 닫히면 된다고 생각했어. 누가 도장을 찍고 무슨 기록이 나가는지는 내 일이 아니라고 했지. 윤 선임이 회의실에서 소리치는 걸 들었는데도 작업대로 돌아왔어.” “그때 한마디라도 했으면 달라졌을까요?” “모르지.” 태수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안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는 말은 할 수 없겠구나. 그다음에 벌어진 일들을 이미 봤으니까.” 우빈은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가 자신의 실수를 이야기하는 일은 아직 서툴렀다. 예전 같았으면 그 말에 화부터 냈을 것이다. 이번에는 사진 뒤편에 적힌 작업자 명단을 함께 살펴보기로 했다. 과거의 사실을 확인하는 데 분노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사진 한구석에 적힌 날짜를 손톱으로 짚었다. ‘1998.11.02’. 앞서 정해원의 출장 기록을 확인했던 바로 그 사고 무렵이었다. 우빈은 사진을 소라에게 전송했다. 처음엔 인물의 정체를 찾아 달라고 쓰려다가 문장을 바꿨다. ‘장갑이 원래 어떤 업무용 물품이었는지 아버지 증언 확보. 사진 원본 보존 중.’ 소라는 곧바로 전화했다. “사진으로 신원은 단정하지 말아요. 차윤서는 직접 얼굴과 손을 확인해 주기 전까진 미상 인물이니까요. 하지만 장갑이 업무용이었다는 건 지금까지의 증거하고 연결돼요.” “윤서가 그 여자면요?” “그때 무엇을 알았고 그 뒤에 무엇을 했는지 확인해야죠.” 말은 차분했지만 소라도 지쳐 있었다. 통화 중간에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우빈은 그녀가 이틀 넘게 충분히 잠을 못 잤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소라 씨. 오늘은 좀 쉬어요.” “당신부터요.” “저는 방금 국도 먹고 왔습니다.” “그건 쉰 게 아니라 먹은 거예요.” 둘은 잠깐 웃었다. 웃음 끝에는 서로에게 미안한 침묵이 남았다. 밤 열한 시, 한지연에게서 긴급 통화가 왔다. 회사 내부 신고 창구에 제출했던 자료가 ‘업무상 오류’로 분류되어 거래 담당자에게 그대로 전달됐다는 것이다. 신고자의 이름도 함께 나갔다. “제가 제출한 사본에는 피해자 이름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걸로도 제 계정을 특정했어요.” “지금 어디예요?” 소라가 물었다. “동생 집 근처예요.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서 들어가진 않았고요.” 우빈은 차 키를 찾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무턱대고 차를 몰고 가면 지연의 가족이 사는 장소까지 드러날 수 있었다. “사람 있는 곳에 계세요.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를 문자로 보내진 않을게요.” 소라가 말했다. “신고자 보호를 담당하는 기관에 바로 연락해요. 필요한 신고 경로는 제가 함께 확인할게요.” 지연이 낮게 웃었다. “전에는 내 번호를 아무도 안 찾았는데, 오늘은 다들 저를 찾네요.” 통화를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찍은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검은 장갑. 그리고 장갑 속 손목에 매달린 금속 고리. [06 / 직무 인계 중] 사람의 이름이 아닌 자리를 누군가가 넘겨받고 있었다. 거래소가 원하는 것은 차윤서 개인만이 아니었다. 언제든 다른 손이 끼울 수 있는 장갑이었다. 새벽 한 시. 지연은 무사히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고 알렸다. 다만 수화기 너머 마지막 말이 무겁게 남았다. “매입자가 바뀌었어요. 차윤서의 이름이 사라졌어요. 조합에서 직접 집행하는 걸로 바꿨대요.” 우빈은 벽에 걸어 둔 사진을 바라봤다. 과거의 한 여자가 어깨 너머로 보이고 있었다. 지금은 그 얼굴을 찾는 것보다, 장갑을 건네받는 일을 멈추는 게 먼저였다. [결제까지 17:12:06] 금고의 남은 시간이 손목시계보다 정확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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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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