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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75화
PAYLUA ORIGINAL · 제75화

75화. 낙찰자를 만나러 가는 길

빚을 먹는 금고 · 3,398자

오프라인 책장
차윤서의 이메일에는 초대장도 첨부파일도 없었다. 다만 도시의 오래된 지도 한 장이 함께 들어 있었다. 이미 매립된 하천의 물길이 초록색으로 표시됐고, 지도 끝에는 ‘다리 아래’라는 글자만 있었다. 우빈은 지도를 반으로 접어 가방에 넣었다. “가자는 게 아닙니다. 저쪽이 어디서 움직이는지 확인할 단서라는 거예요.” “자기 발로 오게 만드는 미끼일 수도 있죠.” 소라가 말했다. 지연은 잠시 고민하다 이메일 발신 정보를 회사의 외부 신고 창구에 전달했다. 회사 내부 접근 권한이 남아 있는 동안 최대한 합법적인 절차로 자료가 지워지는 걸 막고 싶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징계를 받을 수도 있었다. “난 공범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서류마다 내 검토 번호가 있었죠. 처음엔 상품 설명만 봤어요. 거래가 어떻게 사람한테 닿는지는 알 생각도 안 했고요.” 서강재가 시선을 떨궜다. “나도 그랬어요.” “그러니 우리 둘 다 우리가 한 일을 정확히 말해야 해요.” 다섯 시 사십 분, 일행은 매립 하천 옆 오래된 다리로 향했다. 우빈과 소라, 서강재, 지연은 서로 다른 입구를 확인했고 박현정에게 목적지와 연락 시간을 알렸다. 백재헌에게는 직접 동행을 부탁하지 않았다. 그의 옛 권한이 함정의 열쇠가 될 가능성이 컸다. 다리 아래에는 분실물 보관소에서 보았던 검은 장갑과 같은 무늬가 찍힌 비닐 천막이 있었다. 천막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대신 의자 하나와 자판기 한 대가 있었다. 자판기에는 캔커피도 과자도 없었다. 투명한 창 안에 하얀 카드들이 꽂혀 있었다. ‘보증인’, ‘대리인’, ‘수령자’, ‘포기자’, ‘증언자’. “사람이 고를 수 있는 역할을 이렇게 팔아 놓았네요.” 우빈이 중얼거렸다. 스피커에서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불편하시죠? 선택지가 정해져 있다는 건.” 차윤서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소개해 주시죠.” 소라가 말했다. “수취 대행 조합의 임시 운영 책임자입니다. 오늘은 제가 여러분을 보기보다, 여러분이 제 설명을 듣는 게 중요하겠네요.” “사람을 대신 수령자로 만들 권리는 어디서 났습니까?” “그런 권리를 샀다고 생각하시나요? 저희는 확인이 끝나지 않은 지급 업무를 맡는 겁니다. 수백 명이 기다리는 보상금을 처리하려면 누군가가 미확정 건을 떠안아야죠.” “그래서 수령 여부가 불분명한 사람을 가족으로 꾸몄어요?” 우빈이 끼어들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잘못된 사례가 있다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차윤서가 말했다. “하지만 한 건의 오류 때문에 전체 기금을 묶으면 나머지 피해자들은 또 기다려야 해요.” 우빈은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백재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선한 목적을 내세우는 일이 잘못은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그 목적 아래에서 누구의 동의가 없어졌는지였다. 소라가 물었다. “그 기금이 실제로 존재합니까? 그리고 17번 거래의 낙찰액은 누구에게 지급됩니까?” 자판기 안의 카드 하나가 붉게 변했다. ‘응답 거부’. 차윤서의 목소리가 한결 차가워졌다. “당신들에게는 사실을 밝힐 권한이 없습니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건 더 단순한 조건이에요. 거래를 취소해 주면 17번의 책임을 정우빈 씨 한 사람에게 옮기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안전해지죠.” 지연이 외쳤다. “그게 어떻게 취소예요? 다른 주소로 떠넘기는 거지!” 자판기 아래에서 쿵 소리가 났다. 하얀 카드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첫 카드가 우빈의 가슴에 붙었다. [대표 인수인 후보] [정우빈 / 가족 관계 추정 승인] 서강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다 지연에게 팔을 붙잡혔다. 그녀는 그의 눈을 봤다. “지금 대신 인수하겠다고 하면 안 돼요. 예전에 당신이 회수 담당자였다 해도 그건 피해자를 돕는 방법이 아니에요.” “알아요.” 서강재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게 겁나요.”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니죠. 누가 어떤 카드를 내밀었는지 기억하세요. 그걸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있어요.” 서강재는 억지로 손을 폈다. 손바닥에는 자신도 모르게 찍힌 검은 잉크 자국이 있었다. 그는 그 자국을 쓸어 지우려 하지 않고 사진을 남겼다. 우빈은 카드를 떼려 했지만 종이는 피부에 스며들었다.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 속에서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정태수가 아들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돌아섰다. 사진 속 아기는 얼굴 없이 웃고 있었다. “우빈 씨!” 소라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 소라는 손끝으로 카드의 가장자리를 잡아당기지 않았다. 대신 우빈의 시선을 맞췄다. “저 사람들이 보여 주는 장면하고 지금 여기서 일어난 일은 달라요. 어머니가 직접 하신 말 기억해요?” “나를… 금고한테 물어보지 않겠다고.” “그래요. 우린 그런 말을 들었죠.” 우빈은 벽을 짚고 섰다. 자판기 화면에 새 선택지가 떴다. [1. 단독 인수] [2. 일괄 거래 유지] 두 개의 버튼은 금고가 언제나 내밀던 방식이었다. 하나를 누르게 만들고, 누른 행위 자체를 책임으로 바꾸는 것. “둘 다 선택 안 합니다.” 우빈이 말했다. “당신이 거래할 수 있는 권리 자체를 증명하세요.” 차윤서가 웃었다. “증명은 결제일에 해 드리죠. 잔고가 없는 사람은 입찰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소리가 끊겼다. 자판기 문이 열리고 카드들이 바람을 타고 하천 바닥에 흩어졌다. 그중 하나를 지연이 발끝으로 막았다. 단순한 카드가 아니었다. 형광등 아래에서 숫자들이 기어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담보 자산: 계약 정정권] [매수 조건: 정정 요구자 실명 제시] [입찰 계정: BJH-06] 지연의 손이 떨렸다. “이건 피해자가 정정 요구를 하면, 그 정정 요구를 가로채서 다른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뜻이에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 서강재가 물었다. “피해자를 숨겨서도 안 되고, 다 공개해서도 안 돼요. 한 건씩 실제 기록을 고치고, 그 정정이 다른 데서 재판매되지 못하게 거래를 끊어야죠.” 소라가 말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빈의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정태수였다. 금고 안에서 나온 뒤 건강을 회복 중인 아버지는 평소처럼 짧게 물었다. “밥은 먹었냐?” “아직이요.” “네 망치에 새 홈을 파 놨다. 나무 손잡이 밑에. 네가 망치질 잘하려고 하는 건 아니고, 급할 때 미끄러지지 말라고.” 우빈은 잠깐 웃었다. 그러나 다음 말에 웃음이 사라졌다. “아버지. 혹시 BJH-06이 누군지 아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긴 숨소리가 들렸다. “그건 사람 이름이 아니야. 한때 내가 직접 장갑을 건네줬던 자리다.” “누구한테요?” “그때는… 나보다 어렸던 여자애한테.” 우빈은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여자애가 지금 차윤서일까.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일까. 정태수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장갑은 손을 숨기려고 끼는 게 아니었다. 손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끼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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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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