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중앙역은 새 역사가 들어선 뒤 보존 건물로 바뀌었다. 철길이 뜯긴 승강장에는 벤치만 남았고, 분실물 보관소에는 지역 사진 동호회가 기증한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우빈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이곳에서 기차를 기다린 기억이 났다. 정태수는 언제나 표 두 장을 먼저 보여 준 다음, 우빈이 번호를 직접 확인하게 했다.
‘남이 네 표를 가졌다고 해서 네가 탄 건 아니잖아.’
그 말이 지금 와서 이상하게 또렷했다.
오후 세 시 십 분. 그들은 보관소 운영자에게 방문 예약을 했다. 지연은 거래소 설명회와 같은 도장 문양이 붙은 초대장을 지녔지만, 그것을 입장권으로 사용하자는 제안은 하지 않았다.
“거기 들어가면 무언가를 소유했다고 인정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럼 뭐하러 왔어요?” 우빈이 물었다.
“물건 찾으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려고요.” 소라가 대답했다.
분실물 보관소의 임시 안내대에는 여섯 사람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낡은 우산, 지갑, 어린이 장갑, 주소를 적은 버스 카드. 각자 잃어버린 물건이 달랐지만 손에는 똑같은 빨간 영수증이 들려 있었다.
‘본인 물품 수령 시 미확정 관계 정산 동의.’
우빈은 그 문구를 읽고 얼굴이 굳었다.
“잃어버린 물건 찾는 데 왜 남의 빚까지 동의해야 합니까?”
중년 여자가 영수증을 보여 주었다. “우리 아들이 일하다 사고로 죽었어요. 남은 물건을 찾아가라길래 왔죠. 그런데 확인 버튼을 눌러야 상자를 준다네요.”
여자의 이름은 최미정이었다. 아들 도현은 세 달 전 배달 일을 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피해 배상 절차는 별도로 진행 중이었고, 지금 그녀가 찾으려는 것은 아들이 쓰던 휴대전화와 열쇠였다.
소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자 안에 실제로 있는지 보셨어요?”
“못 봤어요. 보여 주지 않아요. 아들 이름만 적혀 있어요.”
우빈은 상자들을 바라봤다. 각각 노란 숫자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열일곱 번째에는 숫자 대신 작은 물음표가 달려 있었다.
“이건 장례 절차를 노리는 건가요?” 지연이 낮게 말했다.
서강재가 고개를 저었다. “더 나쁩니다. 상실을 확인하는 행위를 수령으로 바꾸는 거예요. 누군가의 물건을 되찾고 싶어서 누른 버튼이 거액의 허위채무를 인정했다는 기록이 됩니다.”
미정은 가방 안에서 아들이 생전에 찍은 가족사진 한 장을 꺼냈다. 거기엔 특별한 장면이 없었다. 편의점 앞에서 우산 하나를 함께 들고 웃는 모자였다.
“우리 애는 어디 가서 잘 잃어버렸어요.” 그녀가 말했다. “우산도, 열쇠도, 마스크도. 그래서 제가 늘 찾으러 갔죠. 오늘도 그런 일인 줄 알았어요.”
우빈은 사진 속 웃는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제 없는 사람의 물건을 찾으러 온 일이, 없는 빚을 인정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됐다. 자신의 가족에게서 시작된 일이 이곳에선 낯선 어머니의 삶에 닿아 있었다.
그때 철제 셔터 뒤에서 종이를 긁는 소리가 났다. 검은 장갑을 낀 안내원이 나타났다. 얼굴은 흰 마스크로 가려져 있었다.
“수령 신청자는 번호표를 확인하십시오.”
“이 상자들을 누가 가져다 놓았습니까?” 소라가 물었다.
“대리 보관 계약에 따라—”
“계약 상대방의 이름을 묻는 겁니다.”
안내원은 미리 외운 말을 끝내지 못했다. 손에 든 태블릿 화면이 번쩍였다. 거기에는 누가 물건을 찾아가는지와 상관없이 ‘정산 대상자’가 한 명씩 자동으로 지정되는 표가 떠 있었다.
미정이 울먹이며 말했다.
“그냥 아이 휴대전화만 보고 싶어요.”
우빈은 안내원 앞으로 나섰다. 분노가 밀려왔다. 금고를 닫아 버리고 사람을 막는 일은 쉬웠다. 그러나 셔터 안쪽에 실제 유품이 있다면 그 물건까지 잃게 하는 셈이었다.
“우리가 동의하지 않고 물건을 확인할 방법은요?”
안내원은 한참 화면을 보더니 기계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때 뒤에서 운영자가 소리쳤다. “있어요. 분실물 보관 대장에 실제 접수인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확인된 물건은 정식 보관소 절차에 따라 돌려주면 됩니다. 원래 그게 제 일이에요.”
그의 이름은 남정식이었다. 새벽자산유통 직원이 보관소를 단기 대관한 뒤 사설 접수대를 설치해 놓았다고 했다. 정식 보관 대장에는 붉은 영수증에 있는 여섯 사람의 물건 중 단 두 개만 접수돼 있었다.
“상자 네 개는 누가 가져왔는지도 몰라요. 들여놓지 말라고 했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셔터 안에 있었어요.”
소라가 미정에게 진짜 보관 대장에 이름이 있는지 확인해 주었다. 아들의 휴대전화는 접수된 두 물건 중 하나였다. 남정식은 정식 절차에 따라 유품을 돌려주기로 했다. 붉은 영수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 순간 셔터가 스스로 내려왔다. 검은 종이로 된 긴 팔들이 틈 사이로 미정의 상자에 매달렸다. ‘수령!’ ‘수령!’ 하고 앙칼진 목소리들이 겹쳤다.
우빈이 망치를 들었다. 이번에는 셔터를 내리치는 대신, 바닥에 고정된 비상 정지 손잡이를 눌렀다. 정식 설비의 경고음이 울리고 셔터가 반쯤 멈췄다. 서강재와 남정식이 안쪽에 있던 상자를 잡아당겼다.
종이 팔 하나가 우빈의 목 뒤에 닿았다. 순간 그는 최미정의 아들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눈앞의 이름이 번지며 두 사람의 관계가 지워지는 듯했다.
“그분 이름은 도현이에요!” 소라가 큰 소리로 말했다. “미정 씨가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본 건 유품 목록뿐이에요. 다른 관계를 여기서 결정하지 마세요!”
종이 팔이 힘을 잃었다. 우빈은 어깨를 움츠리고 한발 물러섰다.
유품을 받아 든 미정은 한참 휴대전화 케이스를 쓰다듬었다. 깨진 모서리를 알아본 순간, 그녀는 상자를 안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누구도 조용히 울고 있는 그 여자를 계약의 증인으로 삼지 않았다.
남정식은 붉은 영수증과 사설 접수대에 대해 민원을 접수하고 남겨 둔 영상 자료를 보관하겠다고 했다. 박현정은 그 기록을 다른 피해 확인 자료와 연결할 수 있도록 별도 사건번호를 안내했다.
그때 지연의 휴대전화에 입찰 상태 알림이 떴다.
[미확정채권 00017 / 1차 입찰 종료]
[최고가 제시: 1,700,000,000]
[낙찰자: 수취 대행 조합]
“끝난 거예요?” 우빈이 물었다.
“아직.” 지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돈을 주고받는 최종 결제는 이틀 뒤예요. 그때 실제 수취인을 확정하지 못하면, 대리 관계를 무한히 늘리는 권리를 낙찰자가 가져갑니다.”
우빈은 유품 상자를 품은 미정을 바라봤다. 금고가 사고 싶은 건 사람의 빚이 아니었다. 사람의 슬픔에 이름을 붙일 권리였다.
그날 저녁 그들에게 낯선 이메일이 도착했다.
발신자 표시는 ‘수취 대행 조합 대표 차윤서’. 제목은 한 줄이었다.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경매장에 오십시오.’
제7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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