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공회관의 엘리베이터는 다섯 층까지만 올라갔다. 여섯 층 버튼은 지워진 흔적이 있었고, 대신 열쇠구멍 하나가 남아 있었다.
“폐쇄된 지 십 년 된 건물인데요.” 우빈이 말했다.
“설명회는 꼭 사람이 많이 오는 곳에서 열리지 않아요.” 소라가 주변을 살폈다. “핵심은 누가 출입할 수 있느냐죠.”
오전 아홉 시. 건물 경비실의 근무자는 상공회관 대관 기록에 그런 행사가 없다고 했다. 대신 지하 문서보관실을 임시 임대한 업체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회사명은 ‘새벽자산유통’. 지난해 설립된 작은 법인이었다.
소라는 건물 관리인에게 공개된 임대 내역을 확인하고, 사전에 연락한 박현정에게 자료 보존 절차를 부탁했다. 우빈은 조바심이 났다. 십칠억이라는 숫자가 머릿속에서 자꾸 커졌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먼지가 적었다. 어제 누군가 부지런히 청소한 흔적이었다. 복도 끝에서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 냄새에 뜨거운 플라스틱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때 여자가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 나왔다. 서른 중반의 짧은 머리, 회색 코트, 손에는 커피 대신 작은 서류가방이 들려 있었다.
“서강재.”
“지연 씨.”
한지연은 우빈과 소라를 차례로 쳐다봤다. 서로 인사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휴대전화로 계단 입구를 비추었다. 검은 장갑을 낀 남자가 세 칸 아래에 서 있었다.
“아래로는 가지 마세요. 사람을 가려서 들여보내고 있어요.”
“설명회는?”
“끝났어요. 시작도 하기 전에.”
지연은 세 사람을 빈 회의실로 안내했다. 형광등이 하나 깜박였고 벽에는 ‘투명한 금융, 따뜻한 내일’이라는 오래된 표어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서류가방에서 반으로 접힌 매매 설명서를 꺼냈다.
“왜 의자가 없었는지 알아요? 입찰자는 여기에 앉지 않거든요. 각자 다른 도시에서 숫자만 봐요. 이곳은 거래를 가능하게 만드는 도장만 보관합니다.”
우빈이 문서를 보았다.
[기초 자산: 대리 수취권]
[기준 장부: 원본 02, 07]
[계약 실효 조건: 원수령자의 이의 제기]
“이의 제기하면 계약이 무효라는 거잖아요?”
“반대예요. 그 사람을 찾을 수 없는 동안에는 이의 제기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계산한 거죠.”
지연은 종이 오른쪽의 작은 표시를 가리켰다. 십칠억의 평가금액 아래 ‘당사자 접근률 0.0%’라고 적혀 있었다. 우빈의 이가 저절로 맞물렸다.
“없다고 추정한 사람을 상대로 장사를 했군요.”
“맞아요. 그런데 당사자가 나타나면 금고는 그 사람에게 물어요. ‘당신이 이 기록의 소유자입니까?’ 네라고 답하면 즉시 수령한 것으로 만들죠. 아니라고 답하면 보호를 거절한 것으로 바꿉니다. 둘 다 매수자한테 유리해요.”
소라는 빈 종이에 질문을 적었다.
“지연 씨, 이 설명서는 어디서 구했어요?”
“제가 담당자로서 접근 권한이 있는 공시용 사본이에요. 원본 로그는 제 손으로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회사가 보존해야 할 자료니까요.”
“그럼 이 사본의 출처와 시각을 같이 보관해 주세요.”
지연은 작은 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전부 복사해서 인터넷에 올리고 싶었어요. 근데 그러면 그 사람들의 이름도 또 팔리잖아요.”
복도에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서류가 담긴 금속 카트였다. 벽 너머에서 남자가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06번 건은 인수인이 없으면 07번으로 넘겨. 비어 있어도 됐잖아, 지금껏.”
지연이 손가락을 입에 댔다. 세 사람은 숨을 죽였다.
카트가 멀어지자 우빈이 물었다. “지금 경찰을 부르면 안 되나요?”
“저 사람을 잡아도 회사가 가진 모든 계약이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녹음과 목격 진술은 남길 수 있죠.” 소라가 답했다. “무단으로 들어가지 말고, 우리가 확인한 사실을 정확히 전하자고요.”
지연은 말을 마친 뒤 오래된 직원증을 꺼냈다. 사내 사진이 붙은 카드였지만 직책란은 검은 테이프로 가려져 있었다. 퇴사 예정자라 권한이 제한됐다면서도 왜 계속 설명회 공지를 받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서강재는 카드 뒷면의 숫자를 보고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
“이 번호는 예전에 회수 담당자에게 발급하던 번호인데, 당신은 심사 담당자였잖아요.”
“맞아요. 설명회에 들어갈 권한이 없는 사람도 특정 자료를 본 걸로 찍히는 거예요. 누가 그 기록을 쓰고 있는지도 몰라요.”
소라는 카드 사진을 남긴 뒤 그대로 지연에게 돌려주었다. 겁을 주기 위한 흔적일 수도 있지만, 잘못된 접속 기록이 또 다른 계약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오늘 자신들이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지부터 정확히 메모했다.
문제는 계단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생겼다. 금속 문 위의 비상등이 붉게 변했다.
[본인 확인이 필요한 방문자]
[서류 보관 책임자 1명 지정]
손잡이가 종이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지연이 당황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복도 벽에서 서랍 하나가 튀어나왔다. 서랍 안에는 사람 이름이 하나씩 적힌 목걸이 카드가 놓여 있었다. 서강재는 그중 자신의 예전 사원증을 발견했다.
“내 이름을 붙이면 문이 열릴지도 몰라요.”
“그래서 붙여도 됩니까?” 우빈이 물었다.
서강재는 카드를 내려놓았다. 뒤쪽에서 물결처럼 종이가 바닥으로 흘렀다. 발목에 닿자 차가운 손들이 발을 붙잡는 것 같았다.
지연이 회의실 벽의 오래된 환기창을 발견했다. 바깥 주차장과 연결되는 좁은 배기 통로였다. 그녀는 걸쇠를 돌렸다. 녹슨 나사가 뚝 부러졌다.
“여기로 나갈 수 있겠어요?”
우빈은 가방에서 망치를 꺼냈다. 오늘 처음 꺼내는 망치였다. 그는 문서 서랍이 아니라 환기창의 굳은 경첩을 쳤다. 쇳소리가 한 번 울리고 창이 열렸다.
먼지가 쏟아졌다. 밖에서 지나가던 배달 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셋은 한 사람씩 좁은 통로를 기어 나왔다. 서강재의 팔꿈치가 찢어졌고 지연은 코트 단추 하나를 잃어버렸다. 그래도 누구의 이름도 서랍에 걸어 두지 않았다.
주차장에 내려오자 서류가방 안에서 프린터 소리가 났다. 지연은 가방을 열지도 않았는데 얇은 영수증 한 장이 틈 사이로 밀려 나왔다.
[설명회 참석 확인]
[정우빈 / 매수 관심 등록]
“우리가 언제 등록했다고!” 우빈이 외쳤다.
영수증 밑에는 작은 문장이 있었다.
[참석 사실에 대한 반박 접수 시 자동 낙찰 절차 개시]
소라가 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여기에 답하지 마요. 이것도 함정이에요.”
그때 영수증 뒷면에 누군가 손으로 쓴 듯한 주소가 떠올랐다.
‘새벽자산유통 본점. 주소가 아니라, 주소를 파는 곳.’
우빈은 그 말의 뜻을 몰랐지만 지연은 알아들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거기 있던 사람들의 주소를 전부 다른 쪽에 넘겼다는 뜻이에요.”
제7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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