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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7화
PAYLUA ORIGINAL · 제7화

7화. 가족이라는 담보

빚을 먹는 금고 · 4,809자

오프라인 책장
문이 닫히자 우빈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도영식을 구하려던 손이 아직 허공에 떠 있었다. 찰나의 망설임이 사람 하나를 앗아간 것 같았다. 소라는 그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어쩔 수 없었어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끝나요? 우리 어머니한테 그랬던 사람인데도." "끝나지 않죠. 그래서 우리가 증거를 모으는 거예요." 그녀의 말은 위로라기보다 약속이었다. 우빈은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강재가 앞에서 손전등을 켰다. 좁은 통로는 지하 창고로 이어졌다. 벽에는 송장처럼 긴 서류들이 매달려 있었다. 바람이 없는데도 서류 끝이 흔들렸다. 통로 바닥에는 작은 흰색 화살표가 일정한 간격으로 찍혀 있었다. "이곳은 결제 이전 구간입니다. 도영식이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더라도 당장 정산소로 이송되지는 않을 겁니다." "왜요?" "명의를 넘기는 서류는 세 번 확인해야 하거든요. 세 번째가 끝나면 정말로 돌아오기 어렵습니다." 우빈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아직 되돌릴 수 있다는 거죠." 서강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앞서 들었던 어떤 말보다 신중했다. 통로 끝에서 작은 모니터가 켜졌다. 화면에는 병원 대기실이 비쳤다. 이명숙은 침대에 누워 있지 않았다. 간호사의 팔을 붙잡고 무언가 설명하는 중이었다. "제 아들이 전화했나요?" 간호사가 물었다. "아드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어머니는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우빈은 모니터 앞으로 달려갔다. "엄마! 우빈이! 정우빈이요!" 어머니는 화면 속에서 낯선 이름을 떠올리려는 사람처럼 눈을 찌푸렸다. 곧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오래된 가족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사진에는 어머니와 아버지만 있었다. 우빈이 서 있던 자리는 칼로 도려낸 듯 하얗게 비어 있었다. "기억 담보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서강재가 설명했다. "처음엔 사람의 이름을 잊죠. 그다음에는 그 사람과 있었던 일을 잊습니다. 완전히 끝나면 혈연 증명 기록이 소멸해요. 주민등록에서까지 연결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막아요?" "담보로 등록된 관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출해야 합니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떼면 되잖아요." "공적 장부도 이미 침식되고 있습니다. 원본을 모으세요. 전자 기록보다 오래된 물건, 서명이 아니라 생활의 흔적이 남은 것." 우빈은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 속 가족사진은 방금 전까지 멀쩡했는데, 어느새 모서리가 바랬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찍힌 자신 얼굴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가 사진을 문지르자 얼굴 전체가 손가락에 검은 가루처럼 묻어났다. "이건 안 돼요." 그는 아버지의 망치를 꽉 쥐었다. 나무 손잡이에는 자신이 열두 살 때 새겨 넣은 작은 흠집이 있었다. 당시 그는 못을 잘못 박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는 망치를 고치면 다시 쓸 수 있다며 흠집을 남겨 두었다. 우빈은 그 기억을 소리 내어 말했다. "열두 살 때 아버지가 처음 망치를 주셨어요. 손잡이에 홈을 하나 냈어요. 아버지는 그걸 지우지 않았고요. 그날 엄마가 김치찌개를 끓였어요. 제가 못을 세 번이나 잘못 박아서 다 같이 웃었어요." 망치 손잡이에서 낮은 진동이 느껴졌다. 서강재가 조심스럽게 손전등을 내렸다. "그건 계약서가 아닙니다." "알아요." "그런데 흔적은 남아 있군요." 우빈은 손잡이의 흠집 위에 엄지를 눌렀다. 나무결을 따라 가느다란 빛이 번졌다. 문서처럼 반듯한 빛이 아니라 나무가 갈라지는 모양 그대로였다. [비문서 증거 인정] [관계 보류: 01:00:00] 병원 화면에서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잊었는지 떠올린 사람처럼 눈가를 닦았다. "우리 우빈이…… 맞아. 내 아들이 있지." 우빈은 무릎에 힘이 풀려 벽에 기댔다. 한 시간. 짧지만 아무것도 없던 때보다는 길었다. "왜 이런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가 서강재를 향해 물었다. "누구에게나 되는 방법이 아닙니다. 거짓으로 꾸민 추억은 소용이 없어요. 그리고 물건이 그 사람에게 속해 있어야 하죠." 소라가 말했다. "그러면 사람을 증명할 수 있는 건 결국 사람뿐이네요." 서강재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게 처음 이 기계를 설계한 사람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우빈은 모니터에 비친 어머니 얼굴을 조금 더 바라봤다. 병원 대기실에서 명숙은 직원이 가져다준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컵 속의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주위를 돌아봤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엄마한테 전화해도 돼요?" 우빈이 물었다. 서강재는 잠시 모니터와 우빈의 휴대전화를 번갈아 봤다. "연결 자체가 위험한 건 아닙니다. 다만 기록되는 약속을 하지 마세요. '반드시', '무조건', '내가 대신' 같은 말이 장부에 잡힐 수 있어요." "엄마한테 전화하면서 그런 말도 못해요?" "그들이 듣고 있으니까요." 우빈은 이를 악물었다. 위로 한마디조차 계약이 되는 세계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를 지킬까.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참 만에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우빈아?" "엄마, 저예요." "응. 어디야? 네 아버지한테 가는 중이니?" 우빈은 숨이 막혔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 자세히 설명할 수 없었다. 무엇을 약속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대신 어릴 적 이야기 하나를 꺼냈다. "저 초등학교 때 장난감 자동차 만든 거 기억나요? 바퀴가 자꾸 빠져서 엄마가 집게핀으로 고쳐 줬잖아요." "그랬지. 네 아버지는 못 고치고 내가 고쳤어." 명숙의 목소리에 오랜만에 웃음기가 돌았다. 우빈도 조금 웃었다. "그 자동차 지금도 있어요. 다리가 부러진 장난감 상자 안에 넣어 뒀어요." "그걸 아직 갖고 있니? 엄마는 버린 줄 알았어." "저는 안 버려요. 고칠 수 있잖아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병원 복도에서 카트 소리가 지나갔다. 모니터 속 어머니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눈을 감았다. "우빈아. 나 오늘 좀 이상한 꿈을 꿨어. 네가 없는 집에 살고 있었어. 네가 태어난 방도 빈 방이었고, 네 이름을 생각하면 자꾸 하얀 종이만 보였어." "지금은 기억하시죠?" "기억하지. 그런데 또 잊으면 어쩌나 겁이 난다." 우빈은 손끝이 저려 왔다.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면 장난감 자동차 기억하세요. 제가 만든 못생긴 차요. 그 얘기하면 저도 같이 떠올라요." 명숙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 속에서 그녀가 외투 주머니를 뒤지더니 작은 열쇠고리를 꺼냈다. 낡은 나무 자동차였다. 우빈은 놀랐다. 자신은 그 장난감을 상자에 넣어 둔 줄 알았는데, 어머니가 열쇠고리로 고쳐 가지고 다니고 있었다. "이거?" "그걸 엄마가 갖고 있었어요?" "네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 주고 갔잖니. 엄마 차 열쇠에 달라고." 우빈은 한참 말을 잃었다. 기억이란 이런 것이었다.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르게 지니고 있었고, 한 사람이 잊은 것을 다른 사람이 보관하고 있었다. 아무리 똑똑한 금고라도 그것을 한 장의 서류로 만들 수는 없었다. 통화가 끝나자 망치 손잡이에 새로운 작은 선이 생겼다. [관계 증거 2건 확인] [갱신 유예 신청 가능] "한 시간이 끝나기 전에 다시 이야기할 수 있어요." 우빈이 말했다.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유예를 반복하면 관리자에게 의심받을 겁니다." 서강재가 대답했다. "그러면 더 빨리 원본을 찾아야겠네요." 우빈은 휴대전화를 품에 넣었다. 그의 표정에는 처음으로 겁보다 결심이 더 선명하게 남았다. 그들은 통로를 더 걸었다. 벽에 걸린 문서들이 점점 많아졌다. 어떤 것에는 손도장이, 어떤 것에는 지폐 조각이 붙어 있었다. 소라는 한 장의 종이 앞에서 멈췄다. [이정민 / 수취인 불명] 그녀의 어머니 이름이었다. 종이 아래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녀가 어릴 때 사라졌다고 들었던 바로 그해였다. 소라는 천천히 종이를 떼려 했다. 서강재가 급히 손목을 붙잡았다. "떼어 내면 대상자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확신이 없으면 건드리지 마세요." "살아 있는지 확인도 못 한다고요?" "확인이 재청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소라는 눈물이 고인 채 종이를 내려다봤다. 그때 종이 아래 작은 글씨가 나타났다. [이정민 / 회수 유예] [사유: 00번 금고의 공동 소유자] "엄마가 사라진 게 아니라……" "아직 정산되지 않은 겁니다." 서강재의 답에 소라가 고개를 돌렸다. "알고 있었죠? 처음부터 우리 엄마 이야기를 알고 있었잖아요."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모든 명단을 알고 있진 않습니다. 다만 이 이름은 오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라의 손이 떨렸다. "당신은 우리 엄마를 봤어요?" "한 번. 금고가 처음 회수되던 날." "어디서요?" "정산소 문 앞에서요. 그녀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라면 이 빚을 누가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뭐라고 대답했는데요?" 서강재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규정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소라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말이 갖는 무게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엄마가 없어졌어요?" 서강재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때 통로 스피커가 켜졌다.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세 사람을 맞았다. "정우빈 고객님, 임시 관계 보류가 승인되었습니다. 보류 기간 종료 전까지 가족 관계를 갱신해 주십시오. 미갱신 시 친족 관계는 자동 소멸됩니다." 이어서 화면의 글자가 바뀌었다. [정태수 / 원본 계약자] [이정민 / 공동 증인] [서강재 / 집행 보류 책임자] 그리고 맨 마지막 줄. [정우빈 / 신규 원본 후보] 우빈은 망치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들은 단순히 채무자를 찾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새로 금고의 주인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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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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