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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68화
PAYLUA ORIGINAL · 제68화

68화. 밑바닥의 두 번째 장부

빚을 먹는 금고 · 2,986자

오프라인 책장
백재헌은 가방을 열라는 요구를 듣고 놀라지 않았다. 그저 잠깐 눈을 감더니 손을 책상 위에 올렸다. 자신이 서류 가방을 가지고 왔지만 이제는 그 안의 물건들이 조사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듯했다. “밑바닥에는 오래된 보강판이 있습니다.” “그 뒤에 무엇이 있습니까?” 소라가 물었다. “정해원이 보낸 봉투가 있을 겁니다.” “있을 거라는 건 무슨 뜻이죠?” “그걸 열지 않았으니까요.” 우빈은 기가 막혔다. “이십 년 넘게요?” 백재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고, 그다음에는 무서워졌습니다. 정해원이 떠나기 전에 제게 잘못된 결재를 고치라고 했거든요. 답장을 못 했습니다.” 박현정은 가방을 소유자의 동의 아래 확인하되 상태와 순서를 기록했다. 밑바닥에 얇은 판이 하나 더 있었고, 그 사이에 접힌 봉투가 들어 있었다. 겉면의 주소는 오래된 것이라 일부만 읽혔다. ‘백재헌에게. 다른 사람 이름으로 열지 말 것.’ 백재헌이 그 문장을 소리 내 읽었다. 목소리가 잠깐 떨렸다. “이게 제게 온 거라면 제가 열겠습니다. 내용은 필요하신 범위에서 함께 확인하시죠.” 그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에는 편지 한 장과 옅은 청색 장부 일부가 있었다. 편지의 첫 줄은 짧았다. ‘사람을 도우려고 만든 도장을, 사람을 지우는 데 쓰고 있습니다.’ 서강재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는 회수 담당자였을 때 수없이 들었던 변명을 떠올렸다. 처리가 빨라져서, 기관이 편해져서, 책임질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서. 모두들 좋은 이유를 말했지만 그 끝에서 이름이 사라진 사람을 찾으려 하지는 않았다. 편지에는 1998년 사고 당일의 일이 적혀 있었다. 정해원은 서주 임시쉼터에서 아이들의 인적 사항을 보호하는 절차를 확인하고 돌아왔으며, 자신이 없는 사이 예외 승인실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용해 사건 책임을 정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썼다. ‘나는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확인하지 않았다면, 내 이름을 돌려놓을 사람도 당신입니다.’ 우빈은 백재헌을 바라봤다. “읽지도 않은 편지를 가방에 숨기고 다닌 겁니까?” “읽으면 제가 책임져야 한다는 걸 알았겠지요.” “읽지 않았어도 책임은 그대로였어요.” 백재헌은 반박하지 않았다. 편지 끝에는 장부를 다루는 법이 적혀 있었다. 청색 장부는 지급 기록이 아니라 수령 여부의 예외 목록이었다. 누가 뭘 받았는지를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확인하지 못한 사유를 그대로 남기기 위한 표였다. 소라는 장부의 한 부분을 읽었다. [대상 17명 / 수령 사실 불명] [당사자 진술 확보: 6] [임의 대리 수령 허용: 아니오] 장부 종이는 생각보다 얇았다. 물에 젖었다 말라붙은 자국이 가장자리에 남아 있었고, 숫자 일곱 하나는 급히 고친 듯 다른 잉크로 적혀 있었다. 박현정은 날짜가 같은 다른 서류와 글씨의 번짐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보관한 지 오래된 물건이라는 것과 그 안의 내용이 진실이라는 것은 같지 않았다. 백재헌은 손가락으로 마지막 칸을 가리키다가 멈췄다. 자신이 만든 서명 권한이 결국 어떤 사람들의 기록에 닿았는지 뒤늦게 보는 얼굴이었다. “당신이 이 사람들을 기억합니까?” 우빈이 물었다. “몇 명은요. 진료비를 기다리던 사람도 있고 거처를 옮기느라 연락이 끊긴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명단이 전부인지 자신 없습니다.” “그 사람들한테 돈은 갔나요?” “그건 확인해야 합니다.” 우빈은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바로 그것이 이 장부가 처음부터 남겨 두어야 했던 답이었다.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적는 것. 이상하리만치 평범한 절차를 망가뜨리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열일곱 명.” 그녀가 말했다. “이들이 최초의 미수령자였을 수도 있겠네요.” “아닙니다.” 서강재가 답했다. “열일곱 명 전체가 아니라 그중 일부가 다른 제도에 중복 등록됐을 가능성도 있어요. 명단이 왜 만들어졌는지부터 봅시다.” 우빈은 장부를 다시 살폈다. 열일곱 번째 줄만 이름이 없었다. 대신 작은 손글씨로 ‘아이 한 명, 신원 확인 유보’라고 적혀 있었다. 어린 나래의 이름이 또 등장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옆에는 전혀 다른 문장이 붙어 있었다. ‘미래의 수령자를 만들어 채우지 말 것.’ 백재헌이 중얼거렸다. “정해원이 이 문장을 적었군요.” “증거가 있습니까?” 우빈이 물었다. “필체가 같아요. 하지만 검증받겠습니다.” 그 대답은 늦었지만 이전의 백재헌과 달랐다. 자신의 기억만으로 타인의 삶을 확정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때 소라가 편지의 날짜를 발견했다. 봉투 안쪽에 작게 찍힌 소인은 2002년 6월 13일이었다. 원본 02가 아무도 수령하지 않은 상자를 수령 완료로 바꾼 날과 같았다. “정해원이 원본 02의 오류를 알고 이 편지를 보낸 거예요.” “그럴 수 있죠.” 박현정이 말했다. “발송 경위도 확인해야 하지만 날짜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서강재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미상채권관리 내부에서 새로운 안내가 올라온 것이다. [예외 장부 발견 확인] [17건 자동 보정 시작] [미수령자 식별을 위한 대체 가족 관계 생성] 우빈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제 열일곱 명을 찾는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가족까지 만들어서 책임을 넘기겠다고?” “장부를 닫아요!” 소라가 말했다. 서강재가 연결 단말기의 네트워크를 끊었다. 화면은 멈췄지만 우빈의 손목에는 차가운 종이 띠가 감겼다. 그 위로 또렷한 글씨가 떠올랐다. [17 / 대체 가족 후보: 정우빈] 우빈은 서둘러 종이를 떼었다. 종이는 그의 손안에서 몇 번 꿈틀거리다가 재처럼 흩어졌다. 무너진 건 띠뿐이었다. 다른 기관에 퍼진 새 기록까지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먼저 피해가 생기지 않게 경고를 보내야 해요.” 소라가 말했다. 그때 청색 장부 마지막 장에 있던 작은 글씨가 드러났다. ‘열일곱 번째 아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 아이를 가족으로 등록하지 말 것.’ 우빈은 문장을 바라봤다. 그 아이가 누구이든, 금고는 또 한 사람의 부재를 누군가의 빚으로 바꾸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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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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