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재헌이 정해원을 다른 도시로 보냈다는 말은 새로운 증언이었지만, 아직 사실로 확정할 수는 없었다.
“어디로 보냈습니까?” 김소라가 물었다.
“서주 어린이 임시쉼터요. 사고 현장에서 옮겨진 아이들의 보호 절차를 확인하러 갔습니다.”
“근거가 있습니까?”
“당시 출장 지시서에 제 서명이 있었죠. 하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백재헌은 고개를 떨궜다. 조금 전까지 그는 실물 도장을 잘 아는 전문가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결정한 중요한 일들의 증거를 내놓으라는 질문에는 자신이 없었다.
서강재가 업무용 노트북을 켰다. 그는 미상채권관리의 이전 회수 담당자로서 남겨 둔 권한이 있었지만 이를 이용해 몰래 원본에 접근하지 않았다. 대신 과거 자신이 합법적으로 전달받았던 업무 공지와 백업 목록을 정리했다. 최근 퇴사 절차에서 보존해 둔 개인 메모에 출장 지시서의 문서 번호가 남아 있었다.
“이 번호면 기록관리원에서 보존 여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잘됐네요.” 박현정이 말했다. “다만 백업 목록도 당시 시점의 기록인지 확인하겠습니다.”
우빈은 답답했다. 가방 안에는 아버지의 망치가 있었고, 바로 눈앞에는 이름을 지운 괴물이 서 있었다. 조금만 휘두르면 눈앞의 형상을 부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형상이 부서져도 잘못된 기록의 복사본은 다른 기관으로 넘어간다는 것.
그는 망치 대신 휴대전화의 손전등을 들었다.
“그 서명 날짜부터 봐요. 정해원이 다른 곳에 있었다면 적어도 당일 동선이 있겠죠.”
출력된 대체 서명 규정 옆에는 당시 제도를 고친 이유가 세 줄로 요약돼 있었다. ‘현장에 담당자가 부재한 경우 긴급지원 지연 최소화.’ 글자만 읽으면 반대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문제는 긴급지원의 대상이 누구이고 누구에게 실제로 도착했는지 확인할 의무가 사라졌다는 데 있었다.
“지원이 늦어지면 피해자가 생긴다는 사실은 맞아요.” 소라가 말했다. “그런데 대리 서명이 지원을 빨리 전달했는지, 단순히 전달했다고 표시했는지는 따로 조사해야죠.”
박현정은 예외 승인실의 1998년 근무표와 출장 지시서를 함께 요청했다. 두 자료를 따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었다. 근무표에는 사람이 있고 출장 지시서에는 출장이 있었다. 그러나 서로 모순되는 시각에 같은 사람이 두 곳에 나타난다면, 적어도 한 기록이 잘못됐다는 뜻이었다.
우빈은 빚을 먹는 금고를 처음 열었을 때를 떠올렸다. 금액 하나가 사라졌다는 기쁨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실제로 확인하지 않았는지도 모르던 밤이었다. 이제는 남의 이름으로 찍힌 도장 하나가 너무도 무겁게 보였다.
송윤희가 서고에서 1998년의 봉투 목록을 찾아왔다. 종이에는 오래전 우편 소인이 찍혀 있었다. 발신은 삼목 사고기록 실험동, 수신은 서주 어린이 임시쉼터. 봉투 겉에 적힌 사람은 정해원이었다. 날짜는 사고 당일 오전.
“이걸로는 그분이 정말 도착했는지 모르겠어요.” 송윤희가 말했다.
“맞습니다.” 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사할 장소는 생겼어요.”
그때 검은 형상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흰 네모 모양의 얼굴에 세 글자가 떠올랐다.
[정해원]
다음 순간 같은 자리에 전혀 다른 문장이 적혔다.
[명의 사용 동의 완료]
서강재가 숨을 들이마셨다.
“원본 02가 서명을 쓰기 위해 정해원을 등록했을 때, 다른 쪽에서 동의도 자동으로 만든 겁니다.”
“증거가 있습니까?” 백재헌이 되물었다.
“형상만으로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대조해야죠.”
우빈은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생각했다. 예전에는 금고가 보여 주는 숫자 하나에도 무너졌지만, 이제는 그 숫자가 말하려는 사실과 실제 사람의 삶을 구분할 수 있었다.
박현정이 자료실에서 가져온 오래된 출장 지시서 사본을 펼쳤다. 사고 당일의 발신 기록이었다. 정해원의 서명란은 비어 있었고 백재헌의 결재만 있었다.
“출장 지시 자체는 확인됩니다. 도착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럼 누가 서명을 했습니까?” 우빈이 물었다.
백재헌은 대답 대신 자신의 가방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종이 아래에는 다른 사람의 필체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정해원 부재 시 백재헌 권한으로 대체 서명 가능.’
“제가 승인했습니다.”
우빈은 그를 노려봤다.
“방금 전엔 정해원이 서명하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맞습니다. 정해원은 안 했죠. 제가 남의 이름을 쓸 수 있도록 길을 열었습니다.”
“그걸 왜 이제 말합니까?”
“여기서 여러분이 그날 저를 마주하지 못했으니까요. 저는 늘 늦게 말했습니다.”
우빈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설을 삼켰다. 백재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그 때문에 사라진 사람들의 책임을 면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소라가 조용히 물었다.
“대체 서명 권한을 실제로 행사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백재헌은 종이 뒷면을 돌렸다. 아주 작은 부서 코드가 찍혀 있었다.
[BJH-06 / 예외 승인실]
“그 권한을 넘긴 뒤엔 제가 직접 사용 내역을 보지 않았습니다.”
금고의 복도 안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용하지 않은 권한도 빚이 됩니다.’
“아니.” 우빈이 벽을 향해 말했다. “아무 권한이나 받았다고 가정해서 남에게 빚을 만들 수는 없어. 그리고 저 사람이 잘못한 일은 저 사람이 설명해야지, 다른 사람 이름으로 지울 수도 없고.”
금고가 잠시 침묵했다.
마지막으로 박현정의 전화에 보존 확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서주 임시쉼터의 구 기록 일부가 시립 자료관에 이관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1998년 11월 3일 / 외부 방문자 접수명단]
[정해원 / 방문 시각 14:06]
우빈은 시계를 보았다. 그들이 찾은 것은 정해원이 사고 당일 다른 도시를 방문했다는 흔적이었다. 그러나 사고 현장에 없었다는 결론은 여전히 더 많은 자료가 필요했다.
그때 기록소의 형상이 우빈을 향해 마지막 문장을 띄웠다.
[정해원 증언 요청 전송 완료]
[수신 상태: 열람]
우빈은 얼어붙었다.
누군가 방금, 정해원 앞으로 보낸 증언 요청을 열어 본 것이다.
제6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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