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64화
PAYLUA ORIGINAL · 제64화

64화. 백재헌의 얼굴

빚을 먹는 금고 · 2,763자

오프라인 책장
차에서 내린 남자는 생각보다 늙어 보이지 않았다. 깊게 파인 주름과 흰머리가 있었지만 걸음은 가벼웠다. 회색 코트 안에 깔끔한 셔츠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낡은 서류 가방을 들었다. 경비원과 경찰이 출입을 확인하자 남자는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백재헌입니다. 증언하러 왔습니다.” 우빈은 남자의 얼굴을 보며 오래된 사진을 떠올렸다. 중앙기록관리원에서 본 1998년의 조정 책임자. 사진 속 남자는 지금보다 눈가가 덜 처져 있었지만 이목구비가 같았다. 그렇다고 신분이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복사된 사진과 이름표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박현정은 그를 바로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시설 관리 주체와 조사 담당자가 출입 목적을 확인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남자는 기다리는 동안 담장에 걸린 작은 나무 명패를 가만히 바라봤다. “송윤희 씨가 아직 여기 있습니까?” “알고 계세요?” 우빈이 물었다. “2003년에 제가 채용 결재를 올렸습니다.” “백재헌 권한은 일곱 명이 나눠 썼다던데요.” 남자가 짧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보는군요.” 검은 장갑은 끼고 있지 않았다. 두 손은 맨손이었다. 오른쪽 엄지 밑에 작고 푸른 잉크 얼룩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실제 백재헌이라는 걸 무엇으로 증명하시겠어요?” 소라가 물었다. 남자는 신분증을 다시 내밀지 않았다. 대신 오래된 사진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1998년 작업대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찍힌 사진이었다. 사진 왼쪽에는 정태수가 있었고, 그 옆에는 아직 어린 나래처럼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우빈은 사진을 보다가 표정이 바뀌었다. “이 사진, 전에 못 봤어요.” “당연하지요. 배포하지 않았으니까.” 남자는 사진 가운데 빈 공간을 가리켰다. 사람 두 명이 설 수 있을 만큼 넓었지만 바닥의 그림자만 길게 남아 있었다. “여기에 누가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모르는데요.” “그게 문제입니다. 모두가 모르는 사람을, 서류에는 받은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거든요.” 박현정은 구 신분증뿐 아니라 최근 주소 등록과 연락 가능한 담당 기관을 확인했다. 확인 절차가 길어지는 동안 남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한 번, 주머니 속에서 작은 노란색 종이를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우빈은 그가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적어 둔 것으로 짐작했지만 묻지 않았다. “왜 꼭 오늘입니까?” 소라가 물었다. “수십 년 동안 연락도 없다가 새벽 세 시 십칠 분에 오겠다고 한 이유요.” “정해진 시각에 증언하지 않으면 제 이름으로 된 기록을 정리하겠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누가 보냈죠?” “미상채권관리의 폐쇄된 계정이요. 발신자 이름도 BJH입니다. 결국 제게 제 이름을 돌려받으러 오라는 거죠.” 우빈은 그제야 남자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권한을 만들었던 사람조차 자신의 이름을 누가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 그 불안은 백재헌이 만든 일을 용서할 이유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제 이름을 빌려주었는지 물어야 할 이유였다. 백재헌이라는 남자는 정확히 그런 말을 했다. 02시 47분이 되자 기록소 지하에서 금속이 한 번 울렸다. 보관함의 검은 형상이 허리를 폈고 모든 수령증에서 붉은 표시가 번졌다. [반송 기한 만료] [대체 반송인 자동 지정] [대상: 송윤희] 송윤희가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그녀의 명찰에 붙은 글자가 한 글자씩 희미해졌다. 먼저 ‘희’가 사라지고, 이어 ‘윤’이 지워졌다. “저 사람을 여기로 들여보내세요.” 남자가 말했다. “제가 처리를 중지할 수 있습니다.” 우빈의 손이 망치 가방으로 향했다. 소라가 작게 말했다. “그 사람 말대로 움직이기 전에 확인해요. 이 상황을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잖아요.” 박현정은 송윤희에게 잠시 계단 밖으로 나와 앉도록 권했다. 그녀가 스스로 원한다는 것을 확인한 뒤 직원이 안내했다. 송윤희는 이름을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손목시계에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제가 이 시계를 스무 해 넘게 찼어요.” 그녀가 힘겹게 말했다. “안에 뭐라고 적혔는지 제가 알아요.” 우빈은 눈을 들어 형상을 보았다. 검은 형상은 손목시계의 글씨를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 글씨는 그대로 남았다. 시계가 마법을 이긴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지워도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 소라가 송윤희에게 물었다. “명찰을 뗄까요? 그건 저쪽에서 만드는 화면일 뿐이에요.” 송윤희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명찰을 떼자 형상이 잠깐 멈췄다. 박현정이 현장 일지를 읽었다. 송윤희가 언제 출근했고, 누구와 통화했으며, 어떤 서류를 보존했는지가 차례로 기록돼 있었다. 검은 글자가 그녀의 이름을 다시 구성했다. [대체 반송인 지정 실패] [실제 수취 확인 없음]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여러분이 그 규칙을 알아버렸군요.” “누가 만든 규칙입니까?” 우빈이 물었다. “내 이름으로 승인된 규칙입니다. 하지만 제가 모든 문장에 서명한 건 아닙니다.” 우빈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런 말로 책임을 나눠 버리면 간단하겠네요.” 남자는 침묵했다. 한참 뒤 고개를 숙였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세 시 십칠 분을 알리는 시계 종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그 순간 남자의 서류 가방이 혼자 열렸다. 빈 공간에서 붉은 인주 냄새가 솟아올랐다. 박현정은 그가 손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았다. 가방 안에는 똑같은 도장 일곱 개가 들어 있었다. [증언 시작] [발언자: 백재헌] [서명권자: 확인 불가]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64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64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