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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62화
PAYLUA ORIGINAL · 제62화

62화. 파쇄기 없는 폐기실

빚을 먹는 금고 · 3,092자

오프라인 책장
적재함에서 나온 첫 번째 사람은 작업복을 입은 중년 남자였다.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주저앉아 기침했다. 안쪽에 쌓인 종이 먼지가 숨을 막히게 했던 모양이었다. 신고를 받고 도착한 구급대원이 그를 살피는 동안, 경찰은 차량과 운송 서류를 확인했다. 우빈 일행은 건너편에서 상황을 지켜봤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구급대원이 물었다. “박명호요. 기록소에서 야간 경비를 봅니다.” 그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소라를 바라봤다. “송 선생님한테 전화 오셨죠? 누가 아래층 전기를 끊고 저보고 운송 확인을 해 달라더군요. 문을 열어 보니 차 안에 종이들이 쏟아졌어요. 밖으로 나오려는데 문이 잠기고요.” “누가 시켰습니까?” “모릅니다. 검은 장갑만 봤어요.” 우빈은 순간 몸을 굳혔다. 검은 장갑. 어린 나래의 기억과 같은 물건이었다. 그러나 길거리에서도 살 수 있는 장갑 하나로 28년 전의 사람을 특정할 수는 없었다. 박명호는 호흡이 나아지자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말했다. “실제 기록소는 두 번째 주소예요. 지금 거기서 물이 새요. 송 선생님이 지하 보관실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소라는 경찰에게 그 진술을 전달했고, 박현정은 기록소 관리 주체와 다시 연락했다. 서강재가 차량 적재함을 멀리서 보며 말했다. “파쇄기가 없어도 폐기는 가능합니다. 물과 열, 기록물에 따라서는 습기만으로도 원문이 지워질 수 있어요.” 차 안의 문서들은 대부분 빈 종이였다. 경찰이 꺼낸 한 장에만 붉은 글씨가 번져 있었다. [보관 대상: 인수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모든 증언] 그 문장은 적어도 이 사건에서 폐기하려는 것이 단순한 쓰레기가 아님을 보여 주었다. 박명호는 병원으로 이동하기 직전에 우빈을 불렀다. 그는 손가락으로 적재함 바닥을 두드리며 한 가지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빠져나오려고 문을 두드릴 때마다 안쪽 종이에서 ‘받았습니다’라는 대답이 들렸다는 것이다. 그는 두려워하면서도 열쇠를 훔쳐 차에 올라탄 사람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저 안에서 혹시 종이 묶음을 보셨나요?” 소라가 물었다. “봤어요. 근데 다 백지였어요. 손에 잡으면 무슨 글자가 생기다가, 놓으면 또 없어졌고요.” 우빈은 그 말을 바로 믿지도, 무시하지도 않았다. 종이에 글씨가 보였다는 증언을 적고 물질적인 종이의 보존은 현장 담당자에게 맡겼다. 피해자가 실제로 흡입한 먼지 때문에 치료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우선이었다. 누군가의 이상한 체험이 새로운 서류로 바뀌어 또 다른 사람을 위협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송윤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가 닿지 않았다. 응급 구조 담당자는 기록소 주변에 침수 위험이 있는지 현장 인력에게 안내했다. 밤이 길어질수록 사건의 당사자는 늘어났다. 그만큼 우빈이 함부로 영웅이 되어서는 안 될 이유도 분명해졌다. 실제 기록소 건물은 낮은 담장 안쪽에 있었다. 유리 현관에는 시청 위탁기관 표찰이 붙어 있었고, 마당에는 오래된 소방 펌프가 놓여 있었다. 지하 계단 입구는 모래주머니로 막혀 있었다. 맨 아래 단에서 어두운 물이 올라왔다. 송윤희가 계단 중간에서 손전등을 흔들었다. “여기예요. 서류는 아직 멀쩡한데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요.” 그녀는 우빈의 예상과 달리 아주 침착했다. 예순을 넘긴 듯한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지만, 젖은 신발을 벗을 자리까지 표시해 두었다. “들어오시면 문턱까지만 오세요. 전기 차단은 시설 직원에게 맡겼고, 보관실 안의 물건은 함부로 만지면 안 됩니다.” 우빈은 멈칫했다. 금고를 막는다고 무작정 뛰어들던 초반의 자신이었다면 저 말을 듣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는 망치가 든 가방끈을 고쳐 멨다. “저희가 뭘 도우면 될까요?” “밖에서 상태를 기록해 주세요. 사람들 발이 어디까지 들어왔는지도 남겨야 해요.” 박현정은 동행한 시설 담당자와 보존 절차를 확인했다. 소라는 송윤희에게 지하에 어떤 서류가 있는지 물었다. “생활보호 신청서와 수령 확인표요. 지원을 신청했지만 실제로 어떤 물건이나 돈도 받지 못한 사람들의 기록이 있습니다. 수령 확인을 못 했으니 보관 중이었던 건데, 어느 날부터 수령 완료로 조회되기 시작했어요.” “BJH-07이 자동으로 찍어 버린 거군요.” 서강재가 말했다. “번호만 보면 그렇죠. 그런데 수령 확인표가 왜 그렇게 중요하냐면.” 송윤희가 손전등으로 문 안쪽을 비췄다. 선반 하나에 번호표가 붙어 있었다. [원본 02 / 수령 불능 사유서 / 1998~2002] 선반 앞에는 사람 모양의 검은 형상이 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코트를 입은 사람 같았지만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흰 종이 수십 장이 몸 안을 회전하고 있었다. 송윤희에게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형상이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긴급 보존 대신 책임 인수 동의] [동의 시 지하 침수 중지] “또 이런 식이군.” 우빈이 중얼거렸다. 그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소라도 고개를 저었다. “침수 위험은 설비 문제로 확인해야 하고, 원본은 별도로 보존하면 돼요. 사람 이름을 내놓을 필요는 없어요.” 그때 시설 담당자가 무전을 받았다. 실제 급수관에는 파손이 없었고, 외부 배수는 정상이라는 보고였다. 물은 지하 한쪽 벽에서만 솟아나고 있었다. 벽 아래에 축축한 종이 한 장이 누워 있었다. 형상의 그림자가 그 위를 길게 덮었다. “저게 물을 만드는 건가?” 우빈이 물었다. 서강재가 답했다. “금고가 사람에게 보여 주는 형상일 수는 있어도, 그걸로 현실의 침수 원인을 단정할 순 없습니다.” 우빈은 말을 삼켰다. 형상에게 화가 난다고 해서 지하실 물을 그대로 두는 건 어리석었다. 기록관리원 측에서 방수 가림막과 건조 장비를 준비했고, 시설 직원들이 서류가 놓인 선반의 상태를 촬영했다. 그러자 물길이 한순간 멎었다. 벽 앞의 검은 형상이 주저앉더니 사람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다 말리면, 아무도 대신 갚아 주지 않습니다.” 송윤희가 손전등을 내렸다. “그게 왜 나쁜 일인데요?” 형상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보관실 안쪽, 잠겨 있어야 할 수령함의 작은 창이 열렸다. 그 틈으로 오래된 카드 한 장이 밀려 나왔다. [02 원본 / 최초 수령 불능: 생존자 미확인] [최초 확인자: 송윤희] 송윤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건 제가 쓴 게 아닙니다. 나는 첫 번째 사람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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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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