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령을 다시 만난 곳은 미상채권관리 본사도 본원금고도 아니었다.
중앙기록관리원 별관의 소회의실이었다. 박현정이 공식적으로 접수한 이의 신청의 보충 자료를 검토하는 자리였다. 오미령은 외부인의 요청을 모두 거절하다가 ‘BJH-04 승인 로그의 생성 주체 확인’이라는 문구를 보고 출석했다고 했다.
우빈은 그녀가 들어오자 몸을 굳혔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불안을 이용해 문서를 만든 계정 OM-01. 그 계정의 주인은 미결 못지않게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백재헌입니까?”
오미령은 의자에 앉기도 전에 말했다. “아니요.”
“그 이름으로 된 서류가 어딜 가도 나와요.”
“그건 이름이 아니라 권한 표식이니까요.”
박현정이 기록 장치를 확인하고 발언의 취지를 정리했다. 오미령은 본인 발언이 녹음되는 데 동의했다. 그녀는 가방에서 낡은 사원 규정집 한 권을 꺼냈다. 두꺼운 표지에는 ‘1998년 구조기록 보존 체계 개선안’이라고 적혀 있었다.
“백재헌은 실제로 있던 사람입니다. 민간위탁 조정 책임자였죠. 하지만 처음부터 일곱 사람이 그 사람의 권한을 나눠 쓸 수 있도록 설계됐어요. 서명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 이름으로 결재해도 실제 작업자는 따로 남도록 해야 했는데, 그 작업자 기록이 삭제됐죠.”
소라가 물었다. “누가 삭제했습니까?”
“그건 제가 확인한 자료만으로는 모릅니다.”
“그럼 최소한 당신 계정으로 추가한 규칙은요?”
오미령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2008년에 제가 제안했습니다. 빈 책임 칸을 자동으로 배정하면 지원과 보상 처리가 빨라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접수 기한을 놓쳐서 피해 보는 사람이 줄어들 거라고.”
우빈은 웃음이 나왔다. “좋은 일을 하려다 잘못됐다는 얘기군요.”
“그런 설명으로 빠져나갈 생각은 없습니다.” 오미령이 말했다. “처음엔 속도를 원했고, 나중에는 계약이 돈이 되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어요. 실적도 있었고, 책임을 나눠야 제 이름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니까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오미령의 말은 사과가 아니었다. 그동안 그녀가 어떤 이익을 누렸는지 조사해야 하는 출발점에 가까웠다.
서강재가 규정집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BJH-01~06: 기록 발행 및 대조 승인]
[BJH-07: 수취 사실 확인]
[BJH-00: 인증군 전체 보존]
“07은 장소가 아니었군요.”
“그건 마지막 도장입니다.” 오미령이 말했다. “실제로 책임을 받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였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수취인이 없더라도 ‘미래의 수익자’라는 가상 항목을 만들게 됐습니다. 그러면 시스템은 아무도 받지 않은 책임을 다음 사람에게 넘길 수 있었죠.”
우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서 제 이름이 후보로 뜬 겁니까?”
“당신이 정태수 씨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자동 연결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누가 의도적으로 지정했는지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 말은 내가 최초 채권자라는 증거가 아니라는 거죠.”
“네. 그 기록 하나만으로는요.”
소라는 한숨을 쉬었다. 우빈에게는 처음부터 가장 위험했던 함정이었다. 금고가 보여 주는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누군가의 미래까지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될 뻔했다.
“수취 확인 도장은 누가 보관했죠?” 박현정이 물었다.
오미령이 규정집 끝에 꽂힌 작은 사진을 꺼냈다. 1998년 삼목 철공소 작업대였다. 톱밥이 쌓인 책상 한쪽에 나무로 만든 네모난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앞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고무인이 있었다.
“정태수 씨가 초기에 제작한 수동 확인함이에요. 전산이 멈췄을 때 수기로 증인을 남기려고 만든 장치였다고 들었습니다. 1998년 사고 뒤 실물이 없어졌죠.”
우빈은 사진을 더 가까이 봤다. 상자의 모서리에 비스듬한 흠집 세 개가 있었다. 아버지가 결을 다듬다가 남긴 자국이었다.
“이건 집에 있었어요.”
“지금도 있습니까?” 오미령이 물었다.
“몇 년 전까진 작업장 선반 위에요. 이사하면서 어디 갔는지는 모르겠어요.”
서강재가 사진을 촬영하고 소장 정보를 기록했다. 우빈은 당장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소라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규정집의 날짜부터 맞춰 봐야 해요. 상자가 실제로 금고의 일곱 번째 원본인지 아직 모르잖아요.”
박현정은 오미령이 가져온 자료를 정식으로 보존할 절차를 설명했다. 원본의 출처, 소장 경위, 위조 가능성을 별도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오미령은 일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회의가 끝나자 우빈이 한 가지를 더 물었다.
“백재헌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저도 몰라요.”
“죽었습니까?”
“그것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적이 없습니다.”
오미령은 출입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어요. 백재헌이 처음 만든 건 빚을 없애는 금고가 아니었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을 찾기 위한 접수함이었어요.”
“그게 왜 이렇게 됐습니까?”
“돌아온 사람을 찾는 것보다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더 어렵기 때문이었겠죠.”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나갔다. 우빈은 완전히 믿지 않았다. 회피한 책임이 너무 많았다. 다만 오래된 접수함의 용도를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회의실 밖에서 어린 나래가 성인 나래와 함께 박현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상자 사진을 보더니 숨을 멈췄다.
“저거 기억나요.”
“어디서 봤어?” 우빈이 물었다.
“아저씨 아버지가 만들어 줬어요. 제가 이름을 잊어버리면 여기에 적어 놓으래요. 근데 그날 누군가 상자를 뒤집었어요.”
“뒤집었다고?”
“네. 이름을 적는 쪽을 밑으로 하고, 빈 종이를 위로 놓았어요. 그다음부터는 누구든 거기에 이름을 쓰면 다른 사람이 나가야 한다고 했어요.”
나래는 어른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 사람을 봤어요. 얼굴은 안 떠오르는데 손이 기억나요. 검은 장갑을 꼈거든요.”
서강재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과거 검은 양복 회수자들이 끼던 장갑을 떠올렸다.
나래가 사진 위 한쪽 모서리를 가리켰다.
“여기, 상자 밑에 숨겨진 글씨가 있어요. 어른들은 못 봤던 것 같은데.”
우빈은 사진을 확대했다. 흐릿한 나뭇결 사이에 짧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받지 않은 것은 빚이 아니다.’
그 문장은 시스템의 모든 규칙과 정반대였다.
제5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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