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실은 냉각 팬 소리로 가득했다.
한연주가 카드키를 대자 녹색 불이 들어왔다. 통로에는 노란 선이 두 줄 그어져 있었고 벽마다 안전 점검일이 적혀 있었다. 우빈은 문을 억지로 따지 않고 그 표시를 따라 움직였다. 사방에서 금속이 부딪혔지만 어디에서 사람이 다치는 소리가 나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왼쪽으로 가요. 저 끝에 비상 해제함이 있어요.”
연주는 달리면서도 무전기에 상황을 알렸다. 손기표는 출입구 밖에서 인원을 확인하고 있었다. 소라와 서강재는 통제실 직원과 함께 다른 출구가 열리는지 확인했다. 사람을 구조하는 일에 금고와 싸우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상 해제함은 투명 플라스틱 덮개로 봉해져 있었다. 연주가 사용 절차를 읽고 수동 레버를 내렸다. 기계적인 딸깍 소리가 났다. 그러나 B동 비상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해제 권한: 물품 수취 확인 필요]
우빈은 이를 갈았다. 구멍이 난 문에 못을 박으면 못을 빼면 된다. 하지만 사람의 생사를 서류 빈칸에 묶어 놓았다면 무엇을 빼야 할까.
연주가 말했다. “이 문, 비상 해제는 원래 전산하고 상관없어요. 레버를 당기면 기계적으로 풀려야 하는데.”
“그럼 정말 고장이 났거나 누가 막은 거네요.”
우빈은 금속 덮개 너머 연결봉을 살폈다. 오래전 아버지가 알려 준 대로, 장력이 걸린 곳과 걸리지 않은 곳을 나눠 보았다. 봉은 움직였지만 그 끝의 걸쇠가 두 번째 철판에 걸려 있었다. 누군가 추가로 부착한 부분이었다. 그 철판 위에 창고 송장지가 얇게 감겨 있었다.
“연주 씨, 보세요. 이건 원래 장비의 일부가 아닙니다.”
“맞아요. 저런 건 없었어요.”
우빈은 우선 기계에 손을 대지 않고 휴대전화로 상태를 찍었다. 안전 담당자에게 별도의 폐쇄 부품이 발견됐다고 알린 뒤,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점검하라는 지시를 기다렸다. 구조대가 이미 다른 출입구를 확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창고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때 비상 해제함 속의 송장지가 사람 얼굴처럼 부풀었다.
“수취인이 없으면 누가 책임집니까?”
입술이 없는 얼굴이 물었다. 우빈은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것은 금속과 종이를 동시에 움켜잡고 있었다. 하지만 손을 뻗어 사람을 잡는 대신 글자 하나를 계속 인쇄하고 있었다.
[인수자 미확인]
“안 받겠다.” 우빈이 대답했다. “누가 여기다 붙였는지 확인할 거다.”
“거절도 접수됩니다.”
“거절을 다른 사람의 동의로 바꾸면 안 돼.”
송장 얼굴이 입을 크게 벌렸다. 우빈이 들고 있던 휴대전화의 기록 화면에 새 줄이 생겼다.
[구조 지연 손실: 정우빈]
놀랍게도 그 글씨는 휴대전화 앱 안의 파일명이 아니라 촬영 중인 영상의 피사체 위에 비친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그는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이 현상까지 기록해야 했다.
통로 밖에서 구조대가 외쳤다. “B동 후문 개방했습니다! 안에 계신 분들 순서대로 나오세요!”
문이 열린 순간 송장 얼굴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다만 미완성된 글자를 남긴 채 종잇조각으로 납작하게 접혔다. 우빈은 그 조각을 집어 들지 않았다.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함부로 가져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작업자는 스물여섯 명이었다. 손기표와 안전관리자가 인원을 확인했다. 누구도 중상을 입지 않았지만, 어지럼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어 구급대가 상태를 살폈다. 한연주는 한 사람씩 이름을 불렀다. 누락된 사람이 없는지 동료들끼리 서로 확인했다.
소라가 우빈에게 다가왔다.
“통제실에서 기록을 확보했어요. 원래 출입기록과 사고 신고 시간, 작업 배치표를 따로 보존했어요. 회사 책임자가 사본 제공은 법무 검토 후에 하겠대요.”
“연주 씨가 그날 있었던 증거는요?”
“CCTV에 연주 씨가 보인대요. 다만 파일의 네 시간 구간만 회색으로 처리됐어요. 원본 저장 서버에는 파일 크기가 남아 있고요.”
서강재가 뒤이어 말했다. “그건 주목할 만해요. 내용은 지워졌는데 저장 용량은 남아 있다는 뜻이니까요. 지워진 시간이 실제로 비어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연주는 사고 조사 담당에게 그 사실을 설명했다. 담당은 자료 보존을 약속하고 산업재해 관련 조사를 계속하겠다고 했다. 조성필의 치료는 별도 절차로 진행되도록 조치 중이라고 말했다. 손기표는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임시책임 인수 서류는 제가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저도 그 문서 원본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요. 메일을 인쇄했더니 프린터에서 나왔어요.”
“누구 메일이었죠?” 소라가 물었다.
“회사 안전팀 이름으로 왔어요. 그런데 주소가 이상했어요. 발신자가 없었거든요.”
그는 프린터 기록표의 일부를 보여 줬다. 처리 일자는 정확히 사고 당일 새벽 세 시 십칠 분이었다. 그런데 머리글에는 다른 출처가 적혀 있었다.
[출력 원본: 05 / 시민지원 상담연동실]
우빈은 이마를 찌푸렸다. 창고 안전사고 처리 서류가 왜 시민지원 상담소에서 왔단 말인가.
서강재가 말했다. “이 연결이 중요합니다. 03에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05가 03의 빈칸을 보정했을 수도 있어요.”
“보정이라는 말로 사람을 바꾸겠다는 거군요.” 연주가 짧게 웃었다. “제 네 시간을 없애 놓고.”
우빈은 연주에게 서류를 한 장도 버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연주는 이미 가족과 상의해 보존해 둔 근무수첩을 꺼냈다. 휴대전화와 달리 종이에는 지우개 가루가 없었다. 새벽 두 시 십 분에 먹은 컵라면, 세 시 오 분에 교체한 지게차 배터리, 세 시 이십 분에 동료가 흘린 뜨거운 커피까지 적혀 있었다.
“왜 이런 걸 써 두셨어요?” 우빈이 물었다.
“우리 아빠가 야간버스 기사였거든요. 언젠가 누가 운행 안 했다고 하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라도 남겨 두라고.”
우빈은 아버지의 망치를 떠올렸다. 도구를 오래 쓰는 사람들은 사소한 흔적을 신뢰했다. 그 흔적이 때로는 큰 서류보다 정직했다.
바로 그때 미결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왔다.
[03 / 사실 확인 2건 접수]
[허위 책임 전환 일부 보류]
[상위 발행 경로: 05]
[참고: 05의 상담 기록은 신청인 동의 없이 열람 불가]
우빈은 화면을 소라에게 보여 줬다.
“다음은 05네요.”
소라가 고개를 저었다.
“다음은 그 기록을 만든 사람들을 만나는 거예요. 05라는 숫자 뒤에도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통제실 앞에서 한연주가 작업복을 주워 들었다. 그녀는 한동안 옷에 붙어 있던 야간 근무 명찰을 바라봤다. 두껍게 긁힌 플라스틱 이름표는 여전히 그녀 것이었다.
그런데 그 뒷면에 새 글씨가 나타났다.
[삭제된 네 시간의 인수 기록]
[보관 장소: 구륜시민지원센터 / 지하 문서실]
[인수 책임자: ‘백재헌’]
한연주는 이름표를 우빈에게 보여 줬다.
“이 사람, 우리 회사 직원 아니에요.”
우빈이 말했다.
“그렇겠죠. 어쩌면 일곱 곳 모두에 있는 사람일지도 몰라요.”
제5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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