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물류 공동정산실은 동쪽 외곽순환도로 아래에 있었다.
초록색 가림막 너머로 거대한 창고 세 동이 보였다. 새벽까지 돌아가는 분류시설이라 정문에는 출근하는 직원과 퇴근하는 직원이 뒤섞여 있었다. 카트 바퀴 소리, 후진 경고음, 비닐테이프가 뜯기는 소리가 분주하게 오갔다. 우빈은 잠시 그 풍경에 걸음을 멈췄다. 어머니의 마트 근무를 기다리던 밤마다 자신도 비슷한 창고에서 일했다. 그때는 출근 도장을 찍는 일이 곧 하루를 살아냈다는 증거였다.
한연주는 정문 옆 흡연구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른 중반의 여자는 안전화를 신고 있었고 왼쪽 팔꿈치에 파란 테이프를 감았다.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자 우빈은 흠칫했다. 테이프 위에 검은 송장 번호가 번져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아프세요?”
“아픈 건 아니에요. 자꾸 누가 제 손목에 스티커를 붙이는 기분이 들어요. 씻어도 이 글씨가 남아요.”
소라는 허락을 구한 뒤 손목을 촬영했다. 한연주에게 전화로 약속한 대로 영상과 사진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겠다고 설명했다. 한연주는 휴대전화 화면을 꺼내 사고 당일 근무표를 보여 줬다.
[10월 23일 야간 근무 / 22:00~06:00]
[정정 후 근무 / 22:00~02:00]
[미배정 시간 / 02:00~06:00]
“제가 네 시간 동안 쉬었다면 누가 이 장비를 몰았겠어요?” 한연주가 물었다. “저때 장비 운행기록이 있어요. 분류작업도 찍혔고요. 그런데 인사 시스템에선 제가 사라졌어요.”
서강재는 단말기 화면을 살펴보았다. 미상채권관리의 전환 표식과 비슷한 회색 네모가 근무표 구석에 붙어 있었다. 그는 손을 대지 않고 사진을 확대했다.
“공동정산실이 실제 기록을 수정한 건지, 금고가 여기에 덧칠한 건지부터 나눠야 합니다. 전산 기록만 바뀌었다면 백업이 남았을 수 있죠.”
“백업은 회사가 보여 줘야 하는데요.” 연주가 말했다. “팀장이 제가 기록을 조작했다고 해요. 사고 조사도 아직 안 끝났는데.”
그때 경비실에서 직원 한 명이 나왔다. 반장 손기표였다. 그는 우빈 일행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한연주에게 말했다.
“외부인 데리고 와서 언론에 터뜨릴 생각이면 그만둬요. 사고 처리에 도움 안 됩니다.”
“언론이 아니에요. 제가 일한 기록을 확인하려고 모신 분들이에요.”
“회사에서 확인 중이라니까.”
손기표는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조성필 씨 다친 건 안타까운 일이지. 그렇지만 사고 시간에 본인이 있었다는 걸 증명 못 하면, 한 씨가 안전장치 훼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담당자가 그랬어.”
“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 못 한다고요? 제가 운전한 장비가 있는데!”
우빈은 반장에게 사고 당시 원본 자료를 보존해 달라고 요청했다. 손기표는 회사 승인 없이는 어떤 자료도 내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 말 자체는 옳을 수 있었다. 문제는 거절 뒤에 붙은 문장이었다.
“대신 본인이 책임진다고 서명하면 빨리 끝낼 수 있대요. 조성필 씨 치료비도 지급된다는데, 서로 좋은 거 아닙니까?”
한연주가 종이를 내밀었다. 제목은 ‘사고 임시책임 인수 확인’이었다. 실제 근무 확인도, 장비 조사가 끝났다는 설명도 없었다. 대신 ‘회사 및 기타 관계자의 책임은 정산 완료된 것으로 본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소라는 조용히 종이를 접었다.
“이 문서에 서명하지 않고도 치료비 지급과 사고 조사는 별도로 진행할 수 있어요. 적어도 이 문서가 요구하는 건 사실 확인이 아니라 책임 인수입니다.”
손기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까지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꾸 창고 쪽을 바라봤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지 확인하는 얼굴이었다.
우빈이 말했다. “우선 다친 분이 실제로 치료받고 계신지 연락부터 하죠. 그리고 기록은 없애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한연주는 병원에 있는 동료의 동의하에 통화했다. 조성필은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이었다. 전화를 오래 받을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했다.
“연주 씨가 나를 구했어요. 넘어지는 팔레트에서 끌어냈다고요. 내가 다친 건 그보다 먼저였고.”
연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근데 제 이름이 없대요.”
“나 기억해요. 내가 봤어요.” 조성필이 힘겹게 대답했다.
그 짧은 통화가 끝나자 손목의 검은 글자가 조금 옅어졌다. 소라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았다. 한 사람의 증언으로 인사기록 전체가 복원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금고가 만들어 낸 문장 하나가 현실과 맞지 않음은 확인됐다.
창고 안쪽에서 갑자기 경보가 울렸다.
“반장님!” 경비실 직원이 소리쳤다. “B동 비상문이 안 열립니다. 출입자 기록에 안 잡히는 사람은 밖으로 못 나간대요!”
유리문 너머에서 작업자들이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손잡이를 당겼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출입통제 단말기의 화면에는 송장 번호 같은 숫자가 빽빽했다.
[출고 조건: 근무 시간 정산 완료]
[시간 미확인자: 출입 불가]
우빈이 잠긴 문으로 달려가려 하자 한연주가 어깨를 붙잡았다.
“반대편에 수동 비상 해제 레버가 있어요. 장비실을 거쳐야 가요. 제가 안내할게요.”
손기표는 무전기를 잡았다. 누군가 소방 신고를 하라고 외쳤다. 바깥에서는 실제 안전 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빈은 자신이 망치를 쥐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종이 괴물을 때리는 것보다 사람들을 먼저 내보내는 편이 중요했다.
그때 문 위 유리창에 얼굴 없는 작업자가 나타났다. 이마에는 큼지막한 배송 라벨이 붙어 있었다.
[미배송 물품: 사고 당시의 네 시간]
[반품 주소: 정우빈]
“내가 받은 적도 없는 물건을 왜 나한테 반품해?”
우빈의 물음에 그것은 종이 손가락으로 문 안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가장 가까운 수취인이 책임진다.]
우빈은 망치를 안전한 곳에 내려놓았다.
“그 사람들은 물건이 아니야.”
그리고 한연주를 따라 비상 해제 통로로 뛰었다.
제5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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