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라는 어머니와 만난 사실을 곧바로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대신 센터의 담당자와 앞으로 필요한 일을 차분히 정리했다. 정식 신원 확인 절차, 오랫동안 사용하던 생활 기록의 보존, 건강 상태에 대한 의료적 평가, 본인이 원하는 거주와 연락 방식. 다시 만났다고 해서 어머니가 지난 스물네 해 동안 살아온 생활이 지워져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저랑 같이 가셔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소라가 말했다. “그런데 그러면 또 엄마가 아니라 제 마음부터 생각하는 것 같아서요.”
이정민은 딸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네가 여기 와 준 건 고마워. 그렇지만 내게도 이제 여기가 익숙한 곳이야. 천천히 하자.”
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 현관 불을 켜 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던 자신에게 이 말을 들려줄 수 있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물어야 한다고.
그날 저녁, 우빈과 서강재는 본원금고로 돌아갔다. 박현정은 적갈색 상자의 원본 보존 절차를 진행했고, 장혜숙은 1998년 수기 기록과 2002년 생활 지원 기록 사이의 연결을 확인하는 데 협조했다. 강민호는 여전히 자신의 현재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 채 원할 때 연락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나래 역시 그 뜻을 받아들였다.
“동생을 당장 만나고 싶은데요.” 어린 나래가 말했다.
성인 나래가 아이 옆에 앉았다. “우리 마음이 급한 건 알아. 하지만 민호가 살아온 시간도 우리와 똑같이 진짜야. 준비할 시간을 주자.”
두 사람은 종이에 서로 다른 글씨로 이름을 적었다. 어린 나래는 삐뚤빼뚤하게 ‘강나래’를, 성인 나래는 단정한 필체로 ‘강나래’를 썼다. 같은 이름이었지만 하나의 글씨로 합쳐지지 않았다.
본원금고의 심사실에서는 미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검은 종이는 사람 모양을 흉내 내지 않았다. 낡은 장부처럼 접힌 채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원본 조각의 보존 확인이 완료됐습니다.”
미결이 말했다.
[원본 00-000001]
[문서 종류: 보호 이행 약속]
[구조 대상 안전 확인: 일부 입증]
[목격 기록 보존: 확인]
[구조자 귀환 확인: 추가 검증 진행]
[금전채권 전환 근거: 입증되지 않음]
우빈은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모든 문장은 누구에게 얼마를 청구할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이제 금고는 무엇을 확인했고 무엇을 모르는지 적고 있었다.
“그러면 더는 사람들한테 빚의 괴물을 보내지 않는 거야?”
“현재 원본에서 파생된 자동 청구에 대해서는 집행 보류가 유지됩니다. 확인된 네 건은 전환이 해제됐습니다. 나머지 기록은 개별 검증이 필요합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네.”
“예.”
미결이 짧게 대답했다. 그때 관찰창 안쪽에서 정태수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아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우빈아. 네가 해낸 일이 있구나.”
“아직 아니에요. 아버지, 여기서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내가 진술한 내용으로 조사가 계속돼야겠지. 문을 잠근 건 내 책임이니까.”
“그렇다고 영원히 여기 갇혀 있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잖아요.”
정태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제대로 확인해야겠구나.”
우빈은 아버지를 쉽게 용서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죄를 전부 금고에 넘길 생각도 없었다. 잘못은 검증돼야 하고, 책임은 실제 행동을 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 원칙은 가족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소라가 본원금고에 도착했다. 이정민과의 만남을 공개해도 좋은지 먼저 물었고, 어머니는 원본 보호 약속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사실만 알리는 데 동의했다. 신상과 현재 생활 장소는 비공개로 남겼다.
“엄마가 살아 계세요.” 소라가 말했다.
정태수는 입술을 떨었다. “정민 씨가…… 살아 있다고?”
“네. 다만 아직 모든 기록이 확인된 건 아니에요. 그리고 저희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정태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소라는 그에게 위로를 구하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릴 사람이 여기에도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때 미결이 심사실 탁자 위에 작은 표를 띄웠다.
[제3항: 구조자 귀환 확인]
[현실 증거 제출: 가족 및 당사자 동의하에 가능]
[대체 수령자 지정: 필요 없음]
서강재가 화면을 보며 말했다. “가장 중요했던 부분이 바뀌었군요. 이제 가족 누군가가 대신 빚을 떠안지 않고도 당사자의 귀환을 입증할 수 있어요.”
우빈은 망치를 내려놓았다. 1화에서 우빈은 가족의 채무 계약서를 금고에 넣었다. 그 종이가 사라지자 돈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사라진 빚은 다른 사람을 잡아먹으려 했다. 지금 눈앞의 문은 정반대였다. 누군가의 이름을 넣지 않아도 열 수 있었고, 누군가의 삶을 지우지 않아도 증거가 남았다.
“내가 망치로 문을 부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우빈이 말했다.
서강재가 고개를 저었다. “망치가 필요 없었던 게 아닙니다. 기록이 왜곡될 때마다 그것을 부수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게 필요했던 거겠죠.”
심사실 바깥의 복도에서 어린 나래가 성인 나래와 함께 걸어왔다. 성인 나래는 관찰창을 통과한 뒤 아직 공식 기록상의 신분 확인을 마치지 못했지만, 밖으로 나갈 의사를 분명히 밝혔고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길도 확인하고 있었다. 아이 나래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저씨, 그럼 저는 어디로 가요? 원본의 기억이라면 누군가 다시 가져갈 수도 있잖아요.”
우빈은 아이 앞에 무릎을 굽혔다.
“그건 우리가 정할 일이 아니야. 너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 어떻게 안전하게 지낼지 같이 방법을 찾을 거야. 너는 대기번호가 아니니까.”
아이는 자신의 번호표를 내려다보았다. 종이 한 귀퉁이에 적힌 ‘13’이 흐릿해졌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대신 뒷면에서 작은 해바라기 그림이 나타났다. 장혜숙이 숙제를 끝낸 아이들에게 찍어 주던 바로 그 도장이었다.
나래는 웃었다. “이제 숙제 끝났나 봐요.”
잠깐 평온이 찾아왔다.
미결이 갑자기 몸을 떨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장부가 펼쳐지더니 검은 활자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번에는 우빈이나 나래의 이름이 아니었다. 낯선 지역과 회사 코드들이었다.
[원본 승인 인증군 BJH-00]
[내부 감사 동기화 완료]
[외부 원본 장치 응답: 6개]
“여섯 개?” 서강재가 물었다.
미결이 낮게 대답했다. “제가 보관하던 것은 일곱 인증 장치 중 하나입니다. 나머지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같은 금고가 더 있다는 거야?”
“형태가 같은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승인 규칙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복도 벽이 한꺼번에 검게 변했다. 벽면에 떠오른 것은 숫자였다. 복지시설, 물류센터, 병원, 공공지원 상담소, 주택 보증 심사실. 여러 시설의 이름과 함께 발행 건수가 올라왔다.
[추가 원본군 6건 / 자동 정산 재분류 대기]
[발행 대상 식별: 진행 중]
소라가 침착하게 화면을 기록했다. “어느 시설에서 실제로 문제가 생겼는지 아직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같은 규칙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해야 해요.”
우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한 장소의 사건을 파헤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그들이 부순 것은 거대한 장치의 자물쇠 하나였는지도 몰랐다.
그때 이정민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센터 직원의 도움으로 작성한 짧은 문자였다.
‘소라야. 2002년에 백재헌을 따라갔을 때, 그 사람이 나한테 한 말을 기억했어. 금고는 하나가 아니라고 했어. 일곱 개가 서로의 책임을 지워 준다고.’
이어 두 번째 문자가 왔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아직 열리지 않았대.’
미결의 화면에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제7원본 / 실물 소재 불명]
[최초 채권자 등록 대기]
[후보자: 정우빈]
우빈은 망치의 나무 손잡이를 꽉 쥐었다가 천천히 놓았다.
“이번에는,” 그가 말했다. “누구의 이름도 먼저 쓰지 않겠어.”
심사실의 불이 하나씩 꺼졌다. 여섯 개의 출입구가 동시에 열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제5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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