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구륜역 임시의료지원소는 오래전에 문을 닫았다.
낡은 천막이 있던 자리는 지금 어린이 놀이터였다. 그네와 미끄럼틀 사이에 작은 기념석 하나가 남아 있었다. ‘폭우 이재민 긴급지원’이라는 글씨 아래 여러 기관의 이름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곳에서 누군가는 밤새 종이컵에 물을 나눠 주었고, 누군가는 이름 없는 환자를 들것에 실었다.
장혜숙이 소개한 자원봉사자 이문철은 머리카락이 거의 희끗해진 노인이었다. 그는 동네 작은 수리점에서 손목시계의 배터리를 갈고 있었다. 소라가 왜 찾아왔는지 설명하자, 노인은 오래된 안경을 벗어 닦았다.
“파란 우비요. 기억하죠. 사람들은 그 여자를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자기 이름을 적으라고 하면 종이가 젖어 없어졌거든요.”
“누군가 이름을 일부러 지웠나요?” 소라가 물었다.
“그런 건 모르죠. 다만 그날은 비가 많이 와서 종이가 젖는 일도 흔했어요. 이상하다고 느낀 건 나중 일이었습니다.”
그는 기록을 가진 기관이 아니라 자신이 본 일만 이야기했다. 새벽에 구조 차량이 도착했고 왼손목에 화상 자국이 있는 여자를 실어 왔다. 여자는 몸에 큰 상처가 없었지만 자기 이름을 말하려다 말을 멈췄다. 누군가를 찾는 눈빛이었으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디로 이송됐는지 기억하십니까?”
“내가 차를 운전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지원소가 문을 닫을 때 남은 물품을 가져간 단체 이름은 기억해요. 늘 같은 수녀님이 오셨거든요. 구륜나눔센터.”
소라는 메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소가 있을까요?”
“여기서 차로 반 시간쯤. 다만 그 사람이 지금도 거기 있는지는 몰라요.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말을 거의 못했어요.”
노인은 수리점 벽에서 오래된 사진 하나를 내렸다. 2002년 폭우 지원소에서 찍은 단체사진이었다. 끝자리의 여자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목에 둘러진 붕대와 파란 비옷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가져갈 수는 없지만 보존 상태를 남긴 뒤 사본을 드릴 수 있어요.” 노인이 말했다.
소라는 그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름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한 번 보았다는 이유로 기억해 준 것이 고마웠다. 하지만 그 한 번의 기억이 곧 친자 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구륜나눔센터는 낮은 담장 안쪽에 있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마당에는 작은 감나무가 서 있었고 복도에서는 삶은 감자 냄새가 났다. 이곳은 병원이 아니라 지역 생활지원시설이었다. 거주인의 신상과 병력은 직원이 함부로 보여 줄 수 없었다. 소라는 자신의 사정을 말하면서도 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가족을 찾는 신청 절차가 있을까요? 오래전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분이 이곳의 도움을 받았을 수 있어요.”
센터 직원인 최은주는 잠시 생각했다. “개인정보 때문에 당장 누구를 만나게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본인이 원할 경우 외부인의 연락 요청을 전할 수는 있어요. 오래된 사고 기록과 가족관계 증빙이 있다면 담당 사회복지사가 정식으로 검토할 겁니다.”
소라는 준비해 온 서류를 건넸다. 신청 이유, 가족관계 확인 자료, 어머니의 사진, 2002년의 지원소 기록번호. 서강재는 옆에서 무슨 계약이 함께 붙어 있는지 확인했다. 이미 이번 일이 초자연적인 금고의 덫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겪었다.
접수 과정은 놀라울 만큼 평범했다. 번호표를 뽑고, 연락처를 적고, 담당자의 설명을 들었다. 그 평범함 때문에 소라의 손은 더욱 떨렸다.
한 시간이 지난 뒤 최은주가 돌아왔다.
“말씀하신 기록과 유사한 분이 계셨던 것은 맞습니다. 다만 그분이 찾으시는 분인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본인에게 의사를 확인했고,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조건으로 목소리를 먼저 듣고 싶다고 하셨어요.”
소라가 숨을 삼켰다. “그분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네. 또 한 가지 부탁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알아본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이름을 바꾸거나 어디로 데려가지는 말아 달라고요.”
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마치 어머니가 남겼던 음성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닮았다는 이유로 증거를 생략할 수 없었다.
작은 상담실에 칸막이가 세워졌다. 저편에서는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소라는 손바닥을 허벅지 위에 올리고 앉았다. 우빈은 복도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이 만남은 소라의 것이어야 했다.
“저는 김소라입니다.”
칸막이 너머에서 한참 대답이 없었다.
“이정민이라는 분을 찾고 있어요. 오래전에 제가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지금 다른 이름으로 살고 계셔도, 만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제가 알고 싶은 건…… 괜찮으신지예요.”
낡은 스피커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상담실에는 시계 초침 소리만 남았다.
“소라.”
목소리는 예전 녹음보다 거칠고 느렸다. 한 음절을 말하는 데도 힘이 드는 듯했다.
소라는 눈을 감았다. “네.”
“너는…… 현관 불을 켜 놓고 잤지.”
소라의 어깨가 떨렸다.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 저편의 여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늦을 때마다. 네가 무서워서 그랬는지, 나한테 길을 보여 주려고 그랬는지…… 한 번도 묻지 못했어.”
그 말은 공개된 자료에 없는 사적인 기억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신중해야 했다. 소라는 한참 뒤 입을 열었다.
“엄마는 그때 왜 돌아오지 않았어요?”
칸막이 너머에서 작은 흐느낌이 들렸다.
“사고가 났어. 이름을 잊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잊었어. 몇 번은 기억났다가 또 없어졌어. 나는 네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집으로 가는 길을 못 찾았어.”
소라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긴 시간이 한 번에 무너졌다. 기다리던 아이에게는 이유가 없었고, 사라진 어머니에게는 돌아갈 길이 없었다. 둘 다 잃어버린 시간을 쉽게 되찾을 수 없었다.
센터 직원이 조용히 휴지를 놓고 나갔다. 여자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물었다.
“소라야. 내가 문을 열어도 되겠니?”
소라는 울면서 웃었다.
“네. 이번에는 제가 열게요.”
칸막이가 옆으로 치워졌다. 마른 얼굴의 여자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왼손목에는 오래된 화상 흉터가 남아 있었다. 손끝이 떨렸고, 머리카락은 대부분 희었다. 소라는 처음엔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세월은 사진보다 정직하게 사람을 바꾸었다.
하지만 여자가 두 손을 모았다가 한 손을 펼쳐 보이는 버릇을 보았을 때, 소라는 마침내 앞으로 걸어갔다. 어릴 때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손을 내밀던 바로 그 몸짓이었다.
“엄마.”
여자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왔구나.”
그들은 서로를 껴안았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래 버티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다른 모든 계산은 잠시 멈췄다.
상담실 밖에서 우빈의 전화가 진동했다.
[보호 기록의 실물 당사자 발견 가능]
[미결: 신원 확인 요청]
[자동 귀환 처리 여부 선택]
우빈은 그 요청을 누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났다는 사실을 또다시 금고의 소유권으로 만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4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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