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층 원본 대조실에는 문이 두 개 있었다.
왼쪽 문에는 ‘수령’, 오른쪽 문에는 ‘확인’이라고 쓰여 있었다. 수령 쪽 손잡이는 반짝거렸다. 수많은 사람이 같은 선택을 했던 흔적이었다. 확인 쪽 손잡이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우빈은 오른쪽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작은 의자 하나, 천장의 백열등, 가운데 놓인 적갈색 철제 상자. 구륜역 창고에 있던 상자와 똑같이 생겼지만 녹슨 자국의 위치가 달랐다. 이것이 실제 물건인지, 기억을 토대로 만든 복제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소라는 가장 먼저 촬영 파일의 시간을 기록했다.
“상자보다 방을 먼저 확인해요.”
서강재가 벽면의 나사를 살폈다. 나사는 여덟 개였고, 그중 하나만 십자 홈이 닳아 있었다. 우빈은 아버지의 망치로 그 나사를 건드리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전문가를 불러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곳에서 작은 파손 하나가 새 보증서를 만들어낼까 두려웠다.
백열등 아래 책상에는 수기 기록이 펼쳐져 있었다. 2002년 6월 12일, 이정민의 필체였다.
‘사고 이후에도 금고는 보호 약속을 채무로 바꾸고 있다. 무단으로 실명 수령을 요구한다. 그 요구에 응하면 문이 열리지만, 그 순간 다른 아이 한 명이 새 보호자 대기 명부에 올라간다.’
소라는 숨을 들이마셨다. 어머니는 똑같은 함정을 이미 겪었다. 그런데 편지가 어떻게 남았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음 페이지에는 오래된 사진 두 장이 붙어 있었다. 첫 번째는 1998년 배수실 출구. 파란 우비를 입은 여자가 오른손이 없는 아이의 왼손을 잡고 있었다. 두 번째는 2002년의 복지센터 앞. 장혜숙이 보여 준 사진과 동일했다. 이번에는 사진 뒷면까지 보였다.
‘나는 살아 나왔다. 그러나 기록의 한 조각이 아직 안에 있다.’
“아버지나 나래와 비슷하네요.” 우빈이 말했다. “몸과 기억의 기록이 분리될 수 있다는 뜻이라면.”
“가능성일 뿐이죠.” 소라가 대답했다. “실제로 엄마가 그 뒤 어디서 살았는지는 이 종이로는 알 수 없어요.”
책상에 놓인 낡은 카세트 녹음기가 저절로 켜졌다. 테이프 회전음이 방 안에 울렸다.
‘다음 기록은 내가 직접 말한 것인지, 금고가 내 목소리를 복제한 것인지 여기서는 검증할 수 없습니다. 이 방을 보는 사람에게 부탁합니다. 내 말을 믿기 전에 밖에서 확인해 주세요.’
잠시 잡음이 흘렀다.
‘2002년 6월 12일, 나는 보관층에 들어갔다. 세 번째 원본 조각을 찾았고, 구조자의 귀환을 확인하라는 문장이 남아 있음을 보았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수령자로 쓰려 했다. 나는 거절했고, 비상 통로로 나왔다. 그런데 밖으로 나간 뒤에도 내 기록 일부가 금고 안에 남았다는 걸 알았다.’
소라가 눈을 감았다.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들을수록 고통스러웠다. 어머니는 돌아왔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가족에게는 돌아오지 않았다.
‘금고가 내 이름을 다시 사용할지 모른다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남기고 다시 숨어 지냈습니다. 내 딸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쓰고 싶지만, 그것이 딸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옳은 선택만 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녹음이 여기서 잠깐 끊겼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정민 씨. 지금 나오시면 보호 대상의 이름을 더는 지킬 수 없습니다. 저와 함께 계시면 기록은 잠정 동결됩니다.’
“백재헌인가?” 우빈이 물었다.
서강재는 녹음기에 가까이 다가갔다. “확실하지 않습니다. 백재헌이라는 권한을 쓴 사람이라면 일곱 주체 중 누구든 될 수 있어요.”
다음 순간 카세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바깥의 자동차 경적,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 목소리. 분명 실외 소리였다.
‘안 됩니다. 내 이름을 대신 적지 마세요.’ 이정민이 말했다. ‘기록을 지킬 방법은 내가 감금되는 것뿐이 아니에요.’
바로 이어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테이프는 멈췄다.
소라는 녹음기의 정지 버튼을 손끝으로 살폈다. 어머니가 갇혀 있었다는 이야기만큼이나, 어머니가 탈출했다고 주장하는 기록이 중요했다. 하지만 녹음 한 장을 믿고 어떤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그때 책상 아래에 작은 봉투가 나타났다.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바닥의 그림자에서 봉투가 천천히 떠올랐다.
[출구 확인을 위한 외부 증거]
[보존 원본: 구륜역 임시의료지원소 / 2002.06.13]
[환자 식별: 성명 미기재 / 왼손목 화상 흉터]
“의료 기록?” 우빈이 물었다.
“당사자 신원을 추정할 단서입니다.” 소라가 말했다. “이름이 없다고 엄마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의료기관의 기록은 함부로 열람할 수도 없고요.”
그녀는 봉투를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번호와 기록 소장처만 적었다. 그 이상의 정보는 밖에서 적법한 경로로 확인할 생각이었다.
바닥이 진동했다. 방 안의 상자가 갑자기 붉게 달아올랐다. 왼쪽 문, ‘수령’이라고 적힌 문틈에서 종이 괴물의 손이 나타났다.
[보존 기간 만료 예정]
[실명 수령자 지정 시 소각 중지]
“또 그 말이야.” 우빈이 소리쳤다. “누군가를 채무자로 만들어야 자료를 지킬 수 있다는 거지!”
소라는 천장의 카메라를 바라봤다. “아니요. 우리는 확인하러 왔습니다. 자료를 없애지 말라는 신청은 이미 했어요. 수령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박현정에게 연결된 음성 통화를 켰다. 외부 기록보존사가 접수 시간을 읽었다. 서강재도 원본 보존 신청 번호를 확인했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연결되자 상자 위의 붉은 열기가 조금씩 식었다.
[보존 신청 확인]
[수령자 지정 없이 열람 종료]
우빈은 비로소 숨을 골랐다. 손잡이를 억지로 뜯거나 누군가 대신 서명했다면 금고가 원하던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문을 나서는 순간 소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장혜숙이었다.
“소라 씨. 옛 의료지원소 자원봉사자 한 분과 연락이 됐어요. 그날의 명부를 가지고 계시진 않지만, 파란 우비 입은 여자를 기억한대요. 그리고 그 여자가 어디로 옮겨졌는지 아는 사람도 있답니다.”
소라는 손잡이를 잡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유리 안의 목소리가 아니라, 바깥세상에서 어머니의 흔적을 찾을 실마리가 생겼다.
제4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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