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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47화
PAYLUA ORIGINAL · 제47화

47화. 미결의 대답

빚을 먹는 금고 · 2,746자

오프라인 책장
일곱 개의 관리자 인증 번호를 본 뒤, 우빈은 처음으로 미결을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누가 잘못했는지 알지 못한 채 빈칸을 채우라는 명령만 따랐고, 빈칸을 채우지 못하면 사람을 붙잡았다. 그러나 동정한다고 해서 그 존재가 저지른 피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미결을 만나야겠어요.” 소라는 적갈색 상자의 보관 번호를 수첩에 옮겨 적었다. 창고 관리인은 상자를 임의로 반출하지 않고 별관 인계 절차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사이 우빈과 소라, 서강재는 복제된 인계 카드의 정보만 가지고 본원금고로 돌아왔다. 본원금고의 대기실은 조용했다. 이전에는 벽마다 사람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이제는 이름 대신 사건 번호들이 나란히 떠 있었다. 집행이 보류된 14,196건과 현장 확인으로 파생 청구가 풀린 네 건. 개별 기록의 내용은 각 당사자의 확인 없이는 열리지 않았다. 그 한 가지 변화가 우빈에게는 큰 의미였다. 금고가 사람을 먼저 보는 대신 사건을 구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결. 우리는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검은 종이가 천장에서 흘러내렸다. 한때 사람 키만 했던 형상은 이제 앉은 사람만큼 작았다. 몸 안의 이름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았다. “질문을 수신했습니다.” “백재헌 권한을 쓰는 사람이 일곱 명이야?” “동일 인증군의 사용자는 일곱 개로 기록돼 있습니다.” “일곱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죠?” 소라가 끼어들었다. 미결은 잠시 멈췄다. “그 차이를 검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걸 사람이라고 쓰면 안 돼.” 미결의 어깨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우빈은 바닥에 앉아 그 종이를 보았다. 거기에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희미하게 지워지고 ‘인증 주체’라고 새로 쓰이고 있었다. “누가 원본을 찢었는지는 알아?” “원본은 세 조각으로 분리되었습니다. 보호 대상의 안전 확인, 목격 기록의 보존, 구조자 귀환 확인.” “세 번째 조각을 지금 누가 가지고 있지?” “인증 주체 BJH-00. 위치는 보관층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돌려줘.” “반환에는 원본 수령자의 실명 동의가 필요합니다.” 대기실 벽에 네모난 서명 칸이 떠올랐다. 우빈은 미소를 짓지 않았다. 너무 익숙한 방식이었다. “누구 이름을 적으면 되는데?” “구조자 이정민 또는 보호자 승계 대상 김소라.” 소라의 얼굴이 굳었다. 이미 어머니가 남긴 음성에서도 경고한 함정이었다. 구조자가 돌아왔는지를 확인하겠다는 문서를, 구조자의 딸이 대신 받을 의무가 있는 계약처럼 바꾼 것이다. “둘 다 안 됩니다.” 소라가 대답했다. “어머니가 지금 직접 동의할 수 있는지도 모르고, 저는 승계에 동의하지 않아요.” “그럼 원본을 반환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니.” 우빈이 말했다. “너는 원본을 반환하는 일과 원본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을 섞고 있어. 당장 내달라는 게 아니라, 그 종이가 아직 온전하게 있는지 독립적으로 확인할 길을 알려 달라는 거야.” 미결이 고개를 기울였다. 검은 종이들이 한참 소리를 냈다. “원본의 존재 확인에는 수령자 동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보여 줘.” “관리자 중지권 확인이 필요합니다.” 이번에는 새로운 화면이 떴다. [원본 보존 우선 명령] [신청 가능 대상: 당사자, 증인, 기록보존 담당] [행사 결과: 자동 대행 수령 중지] 소라와 서강재가 서로를 바라봤다. 박현정은 실제 기록보존사였다. 피해자들과 목격자도 있었다. 누군가가 사건을 대신 떠안는 서명이 아니라, 자료를 없애지 말라는 요구였다. “이런 절차가 왜 지금까지 없었어요?” 우빈이 물었다. “있었습니다.” 미결이 답했다. “다만 일곱 인증 주체 가운데 한 주체가 ‘존재 확인 요청을 채무 승계 요청으로 간주하라’는 추가 규칙을 입력했습니다.” “언제?” “2008년 6월 12일.” 오미령이 상용화 규칙을 추가한 날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일부 책임을 인정했던 날짜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결이 말한 주체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인증 번호였다. “OM-01인가?” 서강재가 물었다. “수정 요청 계정은 OM-01. 최종 허가는 BJH-04입니다.” 소라가 수첩에 적었다. “요청한 사람과 승인한 주체가 다르군요. 그걸 같이 기록해야겠어요.” 미결이 갑자기 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사람의 기침 같았지만, 곧 서류를 정리하는 장치의 마찰음임을 알 수 있었다. “제가 잘못 기록한 이름들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우빈은 잠시 생각했다. “먼저 본인에게. 누가 어떤 이름으로 살아왔는지는 그 사람이 제일 잘 알아. 남의 기억이 지워졌다면 그 사실도 기록하고.” “그럼 갚아야 할 사람은?” “없는 채무라면 없어. 실제 잘못이 있었다면 그건 따로 확인해야 하고. 모든 책임이 돈이 되는 건 아니야.” 미결은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우빈에게 처음으로 질문이 아닌 대답을 했다. “저는 지금까지 ‘없음’을 고장으로 처리했습니다. 그 때문에 고장이 아니라 사람이 지워졌습니다.” 대기실 끝에서 작은 문이 열렸다. 문 위에는 ‘보관층 원본 대조실’이라는 낡은 표지가 있었다. “원본이 있음을 확인하십시오.” 미결이 말했다. “수령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거기서 본 것을 밖으로 가져올 수 있을지는 저도 모릅니다.” 우빈이 물었다. “그 안에 이정민 씨가 있나요?” 미결은 검은 손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이정민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이 있다는 뜻은 아니군.” “예. 사람인지는 제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정직한 대답이었다. 그 대답이 처음으로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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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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