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륜역의 옛 화물시장은 공식 지도에는 주차장으로 표시돼 있었다.
낮에는 화물차 기사들이 쉬어 가고, 밤에는 폐업한 가게들의 중고 집기가 반입됐다. 깨진 간판과 낡은 냉장고 사이로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얇은 철판이 달그락거렸다. 서강재가 안내한 창고에는 간판조차 없었다. 문을 열자 안쪽에 서류 보관용 캐비닛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런 곳에 기록을 팔아요?” 우빈이 물었다.
“정식으로 거래할 수 없는 권한표나 복제 명부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은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실제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들은 무턱대고 거래에 참여하지 않았다. 서강재는 내부에서 받은 메시지가 조작됐을 가능성을 먼저 확인했고, 소라는 시장 관리인에게 기록 보관업체가 실제 입주했는지 물었다. 업체명은 정식 사업자 목록에 없었다. 대신 창고 사용대장에 ‘자료정리 대행’이라는 손글씨가 남아 있었다.
문 옆 작은 방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쉰 살쯤 되어 보이는 얼굴, 회색 점퍼, 오래된 계산기. 그는 돈을 세지 않았다. 서류를 넘기면서 빈칸에 도장을 찍고 있었다.
“문서 하나 찾으러 왔습니다.” 서강재가 말했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기는 오래된 물건을 맡아 주는 곳인데요.”
“2002년 보관층 출입 명부요. 구매자 코드가 B.J.H.로 되어 있습니다.”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탁자 아래 손을 넣으려 했다. 소라가 즉시 뒤로 물러나며 출입문이 열려 있는지 확인했다. 우빈도 망치를 꺼내지 않았다. 상대가 위험할 수 있지만 이 자리를 물리적으로 제압할 이유는 없었다.
“당신들을 누가 보냈는지 먼저 말해야겠군.” 남자가 말했다.
“기록의 당사자들이 직접 왔습니다.” 소라가 답했다. “이정민 씨의 가족이고, 당시에 구조된 사람의 증언을 확보했습니다. 제게는 그분 출입 기록의 존재와 보관 경위를 확인할 이유가 있습니다. 구매자 이름을 몰래 알려 달라는 게 아닙니다.”
남자는 잠깐 소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오래된 손전등을 켰다.
“나는 판매자가 아니야. 남들이 없애 달라고 맡긴 기록을 정리하는 사람이지. 거래는 금고가 합니다.”
그는 캐비닛 하나를 열었다. 안에는 주민등록번호나 계좌번호가 적힌 서류가 없었다. 대신 종이마다 ‘누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는가’가 적혀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부모.’ ‘구조를 미룬 기사.’ ‘돌아오지 못한 봉사자.’
“이런 걸 누가 삽니까?” 우빈이 물었다.
“자기 잘못을 대신 뒤집어쓸 사람을 찾는 자들이지. 책임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넘어가면, 원래 일을 저지른 쪽은 안심할 수 있으니까.”
서강재가 조용히 말했다. “금고가 처음에는 사람에게 청구서만 보냈는데, 뒤에서는 그 청구할 권리 자체를 팔고 있었군요.”
남자는 머리를 저었다. “청구할 권리라고 쓰지만 진짜로 파는 건 공백이야. 누가 책임자인지 밝혀지지 않은 자리. 그 자리를 자기 뜻대로 채울 기회.”
창고 안쪽에서 금속 발소리가 들렸다. 검은 장갑을 낀 남자 두 사람이 다가왔다. 하나는 별관에서 만났던 백재헌 권한 대행이었다. 남자는 우빈을 보자 느리게 웃었다.
“여기까지 오실 줄 알았습니다. 정우빈 씨는 참 성실하군요. 아버지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남의 기록을 뒤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니.”
“그 기록은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게 아닙니다.” 우빈이 말했다. “누가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려는 겁니다.”
“확인해서 뭘 하게요? 책임이 밝혀지면 누군가는 처벌받고, 누군가는 돈을 내야 할 텐데. 결국 빚은 돌아옵니다.”
“잘못에 대한 책임과 무단으로 만든 채무는 다릅니다. 당신들은 그걸 일부러 섞었고요.”
대행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계산기 옆에 놓인 작은 인장을 집었다.
[백재헌 / 원본 보관권 행사]
“이 권한만 유효하면 어디에 누가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라가 되물었다. “왜 중요하지 않죠? 권한을 준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이 지금 존재하는지조차 확인이 안 됐는데요.”
그녀는 1998년 임시 접근표와 2002년 장혜숙의 수기 명부를 펼쳤다. 두 장 모두 ‘백재헌’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필체는 달랐다. 하나는 둥근 글씨였고 다른 하나는 각이 져 있었다. 사진도, 지문도 없었다.
“당신이 사용하는 건 한 사람의 권한이 아니라 이름만 남긴 자리일 수 있어요.”
대행이 도장을 내려찍었다. 캐비닛의 문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종이들이 틈에서 빠져나와 사람 키만 한 검은 형상으로 변했다. 괴물은 우빈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남자의 그림자를 향해 기어갔다.
“왜 저쪽으로?” 우빈이 물었다.
서강재가 말했다. “원본 보관권으로 서류를 꺼냈으니, 이번에는 그 권한을 행사한 사람에게 확인을 요구하는 거겠죠.”
대행의 손이 떨렸다. 그는 무언가를 피하려는 듯 사원증을 내던졌다. 사원증에는 얼굴이 없는 사진칸만 남아 있었다. 검은 형상이 그 사진칸 안으로 밀려들었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문밖으로 달아났다. 나머지 한 사람도 따라갔다. 우빈은 쫓지 않았다. 창고에 남은 종이가 어떻게 변하는지 기록해야 했다.
종이 더미 사이에서 적갈색 철제 상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물쇠가 세 개 달려 있었고, 손바닥만 한 종이 투입구가 있었다. 장혜숙이 묘사했던 물건과 같았다.
“상자는 여기 있었네요.” 소라가 말했다.
창고의 남자가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가져가라고 하진 않을 겁니다. 저도 맡아 놓은 물건이니까요. 하지만 목록과 보관 번호는 확인시켜 드릴 수 있어요.”
“정식 인계 절차를 밟겠습니다.” 소라가 답했다.
상자 뚜껑에 붙은 문구가 보였다.
[1998년 구조자 귀환 확인 원본]
[재열람 신청 접수: 2002.06.12]
[처리 상태: 대기]
그 아래에는 우빈을 아는 듯한 손글씨가 있었다.
‘금고가 요구하는 이름을 적지 말 것. 비어 있는 것은 사람의 자리가 아니라 허위 채무의 자리다.’
서강재가 상자 옆에 붙은 인계 카드를 뒤집었다. 뒷면에는 이름 대신 지문 하나가 찍혀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코드가 있었다.
[보관층 관리자 인증: BJH-00]
[인증 사용자: 7명]
백재헌은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곱 사람이 같은 권한을 나눠 쓰고 있었다.
제46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