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9]
우빈은 망치에 떠오른 숫자를 보며 숨을 세었다. 일 분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도영식의 입에서 빠져나온 검은 종이가 김소라의 이름을 향해 날아가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망치로 찍어요!"
소라가 외쳤다. 우빈은 반사적으로 망치를 휘둘렀다. 종이는 허공에서 접혀 충격을 피해 버렸다. 뒤이어 날아온 종이 끈이 소라의 손목을 감았다.
[명의 변경 대기]
[00:00:48]
"어디를 찍으라는 겁니까!"
"서명한 자리를요! 종이 말고 서명!"
우빈은 망치 머리를 가까이 가져갔다. 종이에는 김소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그 아래 서명은 이상했다. 여자가 쓰는 반듯한 필체가 아니라 오른손이 불편한 사람이 억지로 눌러 쓴 필체. 그는 어릴 적 아버지가 손을 다친 뒤 우편물을 수령할 때 남기던 글씨를 떠올렸다.
'소라가 서명한 게 아니야. 누군가 소라의 이름을 대신 적었어.'
우빈은 소라의 손목을 당기는 종이 끈을 망치 자루로 밀어냈다. 서명 아래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실선이 있었다. 영수증 하단의 점선 같은 표시였다.
[대리 작성: 도영식]
그는 그 부분에 망치를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울리자 종이에서 유리 깨지는 듯한 금이 번졌다. 도영식이 비명을 질렀다.
"그걸 깨면 내 쪽으로 돌아온다고!"
"당신이 쓴 거잖아요!"
[00:00:16]
우빈은 한 번 더 망치를 찍었다. 검은 서명이 떨어져 나와 바닥으로 굴렀다. 낙엽처럼 마르지 않은 젖은 종이였다. 도영식의 입에서 종이 뭉치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는 의자에 묶인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대리 보증 거절]
[명의 이전 실패]
소라의 손목을 휘감던 끈이 풀렸다. 우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곧 망치 손잡이에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거부권 행사자에게 회수 절차 고지]
[미승인 담보 1건 보관 중]
"거부했다고 끝난 게 아니네."
소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손목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우빈의 팔 안쪽에는 작은 점선이 생겼다. 마치 소포를 받는 사람의 서명란 같았다.
우빈은 셔츠 소매를 내려 가렸다.
"병원부터 가야 해요."
도영식이 바닥에서 끙끙거렸다.
"너희 아비는 원본의 주인을 안다. 그런데 지금 병원에 없다고 했지? 금고로 들어간 거야. 세상이 그 사람을 빚으로 취급하거든."
"아버지가 만든 사람이라는 겁니까, 빚이라는 겁니까?"
"둘 다. 그 인간은 선택한 적이 있으니까."
도영식은 말을 잇지 못했다. 발목에 감긴 철사 사이로 작은 종이 조각들이 계속 자라났다. 우빈은 한동안 그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왜 이 사람을 구해야 할까. 어머니를 담보로 넘긴 장본인이고, 가족에게 몇 년 동안 겁을 주던 사람이다. 이대로 두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 처리해 줄지 모른다.
하지만 바닥의 숫자가 도영식의 발목을 파먹는 모습을 보는 순간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잘못 박힌 못은 먼저 빼고 왜 나무가 갈라졌는지 살펴야 한다.'
그는 공구함에서 니퍼를 꺼냈다. 도영식이 겁먹은 눈으로 쳐다봤다.
"왜……"
"당신이 죽으면 물어볼 사람이 없어지니까요."
철사를 끊자 도영식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소라는 그에게 물병을 던지듯 건넸다. 자비로운 동작은 아니었다.
"일어나면 경찰서 가요. 위조 서류와 협박 기록 전부 넘길 겁니다. 도망치면 연락할 데가 더 있어요."
그녀는 휴대전화에 사진을 저장했다. 도영식의 발목, 계약서, 한 번 지워졌다 돌아온 이름. 사람들은 나중에 영상을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누가 어디에 있었는지 기록해 두는 것만으로도 저항이었다.
우빈은 잠시 도영식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도영식을 미워하는 건 쉬웠다. 그가 한 짓은 명백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변명하려고 할 때마다 아버지와 같은 단어를 쓰는 것이 괴로웠다. '선택', '책임', '가족'.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옳은 말처럼 들릴 단어들이었다.
"당신은 어머니 이름을 왜 썼어요?"
우빈이 다시 물었다.
"그때는 살고 싶었으니까."
"그다음에는요?"
"무슨 소리야?"
"우리 어머니가 죽으면 당신 빚이 끝나요? 그러면 그다음엔 누구를 찾으려고 했어요?"
도영식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몇 초의 침묵 뒤에, 그는 다시 욕을 내뱉었다.
"나 하나 살아도 안 되는 거라니까!"
"살려고 다른 사람을 밀어 넣으면 결국 모두 죽어요."
"너는 안 그럴 자신 있어? 어머니가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누가 대신 갚겠다고 하면 정말 안 넘길 자신 있어?"
우빈은 입을 다물었다. 도영식의 말은 비겁했지만, 질문만큼은 정면을 찔렀다. 자기도 불과 한 시간 전까지 어머니를 구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 같았다. 무엇이든이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제 겨우 알아 가는 중이었다.
소라가 서류를 모으면서 말했다.
"왜 항상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다쳐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 선택지를 만든 사람부터 찾아야 해요."
도영식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신 엄마도 똑같이 말했지. 옳은 말만 하다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
소라의 손이 멈췄다. 우빈은 두 사람 사이에 섰다.
"그 말은 하지 마세요."
"왜? 사실인데."
"사실이라면 정확히 말해요. 어디서 봤고, 누구랑 있었는지. 죽었다고 단정해서 겁주지 말고."
도영식은 입술을 깨물었다. 소라가 말없이 스마트폰 녹음 버튼을 눌렀다.
"어릴 때 한 번 봤어. 이정민이라는 여자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아버지 서명을 돌려 달라고 했지. 아버지는 돌려줄 수 없다고 했고. 그 여자가 말했어. 서명은 팔아도 기억은 팔 수 없다고."
"그다음은요?"
"모르겠어. 그날 밤 전기가 나갔고, 아버지는 이틀 동안 집에 안 왔어. 돌아왔을 땐 신발에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지. 그걸 내가 왜 아직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소라는 녹음을 끄지 않았다. 차분하게 물었다.
"그 사람은 뭘 입고 있었어요?"
"짙은 녹색 코트. 소매 끝이 해져 있었어."
소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사진 속에서 입고 있던 바로 그 옷이었다. 오래전에 알고 있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되돌아온 듯했다. 어린 자신이 그 코트 끝을 붙잡고 울던 장면.
"그날 엄마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녀가 겨우 말했다.
도영식은 시선을 피했다. 우빈은 그제야 도영식이 두려워하는 것이 괴물뿐 아니라 기억이라는 걸 알아챘다. 자신이 목격한 일을 너무 오래 감춰 둔 사람. 거짓말을 덧대느라 처음 거짓말의 모양조차 잊어버린 사람.
"소라 씨. 기록은 남아 있어요. 우린 그날을 다시 찾아갈 수 있어요."
우빈은 약속하듯 말했다. 그러자 소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약서 사본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찾아요.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이름으로 남기죠."
우빈은 공방 벽에 걸린 낡은 달력을 보았다. 가을날을 가리키는 날짜 아래 아버지의 필체로 짧게 적혀 있었다.
'수정은 숨기는 일이 아니다.'
그 문장을 손끝으로 짚자, 멀리 작업대 아래에서 오래된 기계가 반응하듯 작은 진동을 시작했다.
작업대 아래에서 기계음이 들렸다. 우빈은 아래쪽 철제 서랍을 열었다. 수십 개의 작은 카드가 들어 있었다. 각각의 카드에는 나무 조각이 붙어 있고, 나무마다 음각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01, 02, 03…… 16.
07은 비어 있었다. 서강재가 들고 있던 금고 번호였다. 그 옆 00번 카드에는 굵은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열일곱 개."
소라가 말했다.
"금고가 열일곱 개라는 뜻일까요?"
"회수용도 포함하면 적어도 그만큼이겠죠. 이거 보세요."
우빈은 카드 뒷면을 뒤집었다. 작은 글씨로 물건의 용도가 적혀 있었다.
[03 / 서명 채권]
[05 / 생계 보증]
[11 / 기억 담보]
[16 / 신원 담보]
"금고마다 먹는 게 다르군요."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라져 가던 이유가 단순히 빚을 갚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 빚의 종류를 바꿔가며 사람의 삶을 거래하고 있었다.
그때 작업장 구석의 오래된 팩스가 혼자 움직였다. 플러그는 뽑혀 있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정태수 관련 원본 열람 요청 접수]
[신청자: 정우빈]
[수수료: 가족 관계 1건]
우빈은 읽고도 손을 떼지 못했다. 가족 관계를 지불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어머니가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법적 기록에서 아들인 자신이 없어지는 것일까.
"읽지만 마요. 손 떼요."
소라가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손가락 끝에 잉크가 묻어 있었다. 작은 글자 하나가 움직였다.
[승인 대기]
"신청한 적 없어요."
"가까이 오면 저절로 서명된 척해요. 그게 이 물건들의 방식이에요. 사람은 글자를 읽는 순간 동의했다고 믿게 되는 거죠."
소라는 팩스 출력물을 투명 비닐에 담았다. 도영식은 상자 쪽으로 눈길을 주고 있었다.
"너희는 00을 찾는 거지? 00은 빈 금고가 아니야."
"어딨어요?"
"찾으면 안 돼. 네 아버지가 그걸 숨긴 이유가 있어."
도영식은 입술을 문질렀다. 그 입술 아래로 여전히 검은 종이 조각이 보였다.
"우리 아버지는 그 금고를 만들다가 사람이 없어질 때마다 이렇게 말했어. 원금은 돈이 아니라 약속의 무게라고. 그 약속을 저울에 올리려면 사람이 필요하다고."
우빈은 잠자코 서 있었다.
"그리고 처음 저울에 올라간 사람은……"
도영식이 무언가 더 말하려던 순간, 밖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작업장 앞에 정차한 검은 승합차였다. 양복 차림의 사람들이 다섯 명 내렸다. 그들의 가슴에는 똑같은 정사각형 배지가 달려 있었다.
소라가 불을 껐다.
"회수자들인가요?"
"아니."
도영식이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회수자는 혼자 다녀. 저 사람들은 회수가 아니라 장부를 새로 써."
승합차 문이 다시 열렸다. 내린 사람 하나가 철공소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정태수의 혈족, 정우빈을 확보한다. 본인 동의는 요구하지 않는다."
우빈의 팔 안쪽에 있던 점선이 그 말에 맞춰 길어졌다.
[미승인 담보 1건]
[강제 징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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