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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4화
PAYLUA ORIGINAL · 제4화

4화. 서명하지 않은 보증인

빚을 먹는 금고 · 5,004자

오프라인 책장
새벽 한 시 십칠 분. 병원 지하 주차장에는 세차를 기다리는 택시 두 대만 남아 있었다. 우빈은 어머니를 보호자 대기실에 눕혀 두고 나왔다. 어머니의 시간이 줄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긴 어려웠지만, 자신이 곁에 있다고 막을 수 있는 종류의 위험도 아니었다. 김소라는 병원 자원봉사자에게 부탁해 어머니 곁을 지킬 사람을 구해 놓았다. 다만 숫자를 보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삼목 철공소까지 얼마나 걸려요?" "차로 삼십 분. 문을 열고 사람을 찾을 시간까지 생각하면 기한이 빠듯해요." "먼저 확인할 게 있어요." 우빈은 서강재가 던진 명함을 차 보닛 위에 올렸다. 손가락으로 검은 사각형을 누르자 그 아래에서 가느다란 선이 드러났다. 실처럼 이어진 글자들이 주차장의 바람을 거슬러 들썩였다. [열람 대상: 최초 보증 계약 1건] "아까는 이런 글자 없었는데." "권한이 생긴 거죠. 회수자가 임시로 빌려준 거예요. 서류가 가까이 있어야 읽혀요." 소라가 말했다. 우빈은 가방에서 아버지의 계약서 사본을 꺼냈다. 첫 장에는 보증인의 이름과 도장이 또렷했다. 두 번째 장에는 도영식의 도장이, 세 번째 장에는 지워진 표가 있었다. 명함을 위에 올리자 지워진 표가 번져 나왔다. [채무 발생자: 도기철] [명의 차용자: 도영식] [외부 보증인: 정태수] [2차 담보: 배우자 이명숙, 자녀 정우빈] [적용 조건: 작성자의 자필 승낙] 우빈은 마지막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자신과 어머니의 이름이 분명히 있었지만, 승낙한 적은 없었다. "이건 위조예요." "한 가지만으로 위조라고 결론 내리진 말아요. 본문은 뒤에 수정될 수 있고, 그 수정 기록이 남아야 해요." 소라는 기록을 가리켰다. [수정 시각: 2026-10-25 23:07] [작성자: 도영식] 어머니의 손등에 직인이 나타난 바로 그 시간이었다. "잡았네요." "아뇨. 이제 증명할 방법을 찾은 거예요." 우빈은 도영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두 번째 전화도 끊겼다. 세 번째에는 음성 메시지만 남겼다. "당신이 우리 가족 이름을 넣은 기록을 봤어요. 경찰에 넘기겠습니다." 잠시 뒤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경찰도 장부 속 사람이다. 들어오면 잃는다.] 우빈은 휴대전화를 쥐고 한동안 서 있었다. 사채업자가 협박하던 때와 다른 문장이다. 그에게도 두려워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차는 마른 새벽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우빈이 창밖을 보고 있는 동안 소라는 노트북으로 오래된 공장 등기 기록을 훑었다. 폐업 신고가 접수된 날짜는 서로 달랐지만, 건물이 넘어간 마지막 법인 주소는 같았다. "여기 보세요. 삼목 철공소 소유자가 세 번 바뀌었어요. 마지막에 산 회사는 금융업체예요. 철공소를 금융업체가 사들인 이유가 뭘까요?" "땅값 때문일 수도 있죠. 이 동네가 한동안 재개발 얘기로 시끄러웠거든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은행에 근저당을 잡을 때는 통상 감정평가를 하잖아요. 여기에는 그 기록이 없어요. 법인이 물건 대신 채무를 담보로 받았다는 식으로 처리했어요." 우빈은 낯선 법률 용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라는 화면에 손가락을 대며 천천히 설명했다. 철공소의 땅과 건물이 아니라, 이곳을 드나든 사람들의 약속 자체가 거래된 것처럼 기록됐다는 이야기였다. "서류상으로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약속을 재산처럼 사고판 셈이네요." "말도 안 되잖아요." "그래서 누군가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는지 찾아야 하죠." 소라는 차 안에서 작은 초콜릿을 꺼내 우빈에게 건넸다. 우빈은 고개를 저었다. "먹어요. 얼굴이 하얘졌어요."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요." "그럴수록 먹어야 해요. 굶으면 판단이 느려져요." 우빈은 초콜릿 포장을 뜯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지자 어릴 때 아버지 공방에서 일을 도울 때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일할 때 꼭 사탕을 하나씩 건네곤 했다. 손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이 아무리 무너져도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나무 다루는 법을 저한테 가르쳤어요. 장부를 다루는 건 본 적 없어요. 그런데 명함을 보는 순간 저렇게 글씨가 나타났거든요." 그는 서강재 명함을 보여줬다. 소라는 명함을 받아 들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바라봤다. "이 물건이 저보다 우빈 씨에게 더 반응하는 것 같네요." "왜 그렇죠?" "아버지와 연결돼서일 수도 있고, 원래 금고의 주인을 찾는 장치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의심부터 해요. 우리 눈에 보이는 정보라고 전부 사실은 아닐 수 있어요." 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조심스러워하는 이유가 조금 이해됐다. "김소라 씨는 얼마를 잃었습니까?" "돈으로요?" "네." "그 질문이면 대답 못 해요. 계약서상으로는 4천만 원이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잃은 건 그 돈 때문에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 시간이죠. 아버지는 엄마를 찾느라 생계를 포기했고, 저는 사기를 당하고 나서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무서워졌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왜 저를 도와요?" 우빈이 물었다. "우빈 씨는 사기 당한 사람이지만, 제가 찾던 서류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솔직한 답이었다. 이상하게 그 솔직함이 신뢰를 만들었다. 그때 도로 옆 전광판에 '채무조정 상담 접수'라는 문구가 떴다. 우빈은 얼굴을 찡그렸다. 글자 아래에서 짧은 순간 [기억 담보 가능]이라는 문장이 스쳤다. 소라도 본 듯 시선을 돌렸다. "이것들이 이제 광고까지 하네요." "원래 광고부터 했을지도 모르죠. 우리가 이제 보는 거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차창을 바라봤다. 새벽의 도시에는 불이 켜진 건물만큼이나 많은 계약이 숨어 있었다. 삼목 철공소는 재개발 구역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펜스로 둘러친 공터 너머로 오래된 벽돌 굴뚝이 남아 있었고, 길가에는 철거를 알리는 현수막이 찢겨 나부꼈다. 공방의 문에는 형편없는 글씨로 '위험, 출입금지'가 적혀 있었다. 우빈은 망치로 문고리를 두드렸다. 손바닥으로 살살 밀자 문이 열렸다. 뜻밖에도 내부는 깨끗했다. 작업대 위 목재가 반듯하게 쌓여 있었고, 스패너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누군가 계속 쓰고 있어요." 소라가 바닥을 살폈다. 오래된 먼지 위로 새 구두 자국이 찍혀 있었다. 뒤꿈치에 사각 무늬가 있는 구두. 도영식의 낡은 구두에서 봤던 것과 비슷했다. "도영식이 다녀간 것 같아요." "도망쳤을 텐데요." "이곳이 숨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면 돌아왔을지도 모르죠." 작업대 아래에는 아버지가 쓰던 나무 상자가 있었다. 우빈은 단번에 알아봤다. 뚜껑에 새겨진 작은 별 모양. 어린 시절 자신이 잘못 찍은 낙인을 아버지가 깎아 내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 흔적이었다. 상자를 열자 얇은 목재 판이 나왔다. 판의 표면에는 빽빽한 줄이 그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치수표인 줄 알았지만, 줄 끝마다 이름이 있었다. [정태수 / 설계] [도기철 / 연동] [이정민 / 증인] 세 번째 이름 옆에는 피처럼 붉은 목공용 연필 자국이 그어져 있었다. 아래쪽 작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 번 쓴 맹세는 없던 일로 할 수 없다. 다만 최초의 맹세로 되돌릴 수 있다.' "이정민이 누군지 알아요?" 소라는 노트북으로 검색했다. 결과가 없었다. 대신 십 년 전 기사 하나가 잡혔다. 불법 대부업 피해자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는 짧은 기사였다. 기사 사진 속에는 젊은 여자가 스스로 만든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남의 빚을 대신 갚게 하지 마세요.' 사진 아래 이름이 있었다. 이정민. 소라는 사진을 보는 순간 숨을 멈췄다. "우리 엄마예요." 우빈이 그녀를 돌아봤다. "어머니요?" "스물한 살 때 집을 나가셨다고 들었어요.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말도 들었고요. 가족마다 말이 달랐어요. 그런데 이런 사진은 처음 봐요." 소라는 화면을 확대했다. 사진 뒤편에 선 남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의 손에는 네모난 검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금고였다. 건물 안쪽에서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둘은 입을 다물고 소리 나는 곳으로 향했다. 작업대 뒤쪽에 작은 문이 있었다. 문틈으로 노란 전등이 보였다. 안에는 도영식이 있었다. 그는 왼쪽 발목을 철사로 의자에 묶고 있었다. 철사 아래로 연필로 쓴 것 같은 숫자가 기어 나와 바닥을 덮었다. 거짓말처럼 몸에 붙은 숫자들이 그의 살을 먹고 있었다. "도망가는 것보다 묶어 두는 게 안전하더라." 도영식이 말했다. "우리 어머니 이름을 썼죠?" 우빈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차분해서 자신도 낯설었다. 도영식은 입술을 비틀었다. "안 그러면 내 이름으로 전부 돌아오니까. 내가 대신 죽게 생겼는데 어떡하라고." "그래서 우리 엄마가 죽어도 됩니까?" "너는 이해 못 해. 저 금고는 한 사람한테서 끝나지 않아. 옆으로 옮겨야 잠깐 멈춘다고." 우빈이 한 걸음 다가서자 도영식이 소리를 질렀다. "그 계약서 네 아비가 만든 거야! 그 사람이 맨 처음 서명했어!" "무슨 뜻이에요?" 도영식은 테이블 위에 놓인 낡은 사진 한 장을 밀었다. 사진 속에는 정태수와 도기철, 이정민이 나란히 서 있었다. 셋은 검은 금고를 둘러싸고 있었고, 금고 앞면에는 푸른 낙인이 찍혀 있었다. [00 / 원금] 도영식은 그 사진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게 최초의 금고야. 우리 아버지가 만든 것도, 네 아버지가 만든 것도 아니야. 저 안에 들어 있는 걸 세 사람이 나눠 갖기로 했지." 소라가 사진을 낚아챘다. "나눠 가졌다고요? 뭘요?" "사람이 갚을 수 없어서 사람한테 넘기는 것. 원래 주인이 없는 빚." 도영식은 갑자기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검은 숫자가 피어났다. [회수 승인] 그는 입을 벌렸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입 안에서 새까만 종이가 뭉쳐졌다. 종이는 천천히 펴지며 서류 한 장의 모양이 되었다. [명의 변경 요청서] [이명숙 → 김소라] 소라가 뒷걸음질을 쳤다. 도영식의 얼굴을 통과해 나온 두 번째 종이에는 그녀의 서명이 이미 찍혀 있었다. 그녀는 서명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우빈이 들고 있던 아버지의 망치 손잡이에 새 글자가 떠올랐다. [최초 보증인 증인의 혈족 / 정우빈] [거부권 행사 가능: 0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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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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