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3화
PAYLUA ORIGINAL · 제3화

3화. 사라진 빚의 주소

빚을 먹는 금고 · 4,951자

오프라인 책장
응급실에서 우빈은 이름을 세 번 말했다. 접수 직원은 처음 두 번은 알아듣지 못했다. 세 번째 말하자 모니터가 검게 깜빡이고, 직원은 마치 잠에서 깬 사람처럼 우빈을 바라봤다. "보호자 성함이요?" "정우빈이요. 환자 이명숙, 제 어머니입니다." "아까 접수하신 분과 다른 분이세요?" "저밖에 없었습니다." 직원은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화면에는 환자 이름이 두 개 떠 있었다. 이명숙. 그리고 '담보물 014'. 우빈은 눈을 찡그렸다. 직원에게는 두 번째 항목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평범하게 신분증을 돌려주었다. 침대에 누운 어머니는 눈을 뜨지 못했다. 의사는 과호흡에 따른 일시적인 혈류 이상이라고 설명했지만, 우빈이 보는 어머니의 손등에는 붉은 직인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손목 안쪽에는 시계처럼 숫자가 줄어들었다. [05:42:17] 우빈은 의료진에게 숫자를 가리켰다. 의사는 피부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본인만 볼 수 있는 글자.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면, 이건 눈에 보이는 방식부터 사람을 골라 차별하는 세계였다. 당직 의사는 우빈에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대기하라고 했다. 우빈은 자동판매기 앞에서 물 한 병을 뽑으려다 손을 멈췄다. 화면에는 평소처럼 가격과 결제 수단이 적혀 있었다. 환각이 다시 나타날까 두려워 현금을 넣었다. 생수가 떨어지는 소리는 새벽 병원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어머니의 베개를 고쳐 놓았다. 명숙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숨 쉬었다. 직인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그녀가 안정됐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부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보호자분, 환자분 약 드시는 거 있나요?" 간호사가 물었다. 우빈은 집에서 가져온 약 봉투를 건넸다. 어머니는 아버지 병원비를 우선하느라 자신의 정기 검진을 몇 번 미뤘다. 약 봉투 바닥에는 포장된 알약 두 알이 남아 있었다. 우빈은 작은 사실 하나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머니는 괜찮다고 말할 때도 아프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과거 병력은 보호자분이 좀 더 정확히 아실까요?" "알 줄 알았는데, 모르는 게 많네요." 그가 답하자 간호사는 별말 없이 기록을 이어 썼다. 복도 벽의 안내 방송이 울렸다. 응급 상황을 알리는 평범한 소리였다. 하지만 우빈은 '비상'이라는 두 글자를 듣자 서류 모서리가 접히는 모습을 떠올렸다. 아까 집 앞에 나타난 괴물은 몸 전체가 서류였고, 자신이 망치로 쳤을 때 잠깐 아파했다. 저 종이의 성질을 이해하면 막을 수 있을까. 그는 휴대전화 메모장에 기억나는 것을 적었다. 첫째, 금고에 서류를 넣자 은행 앱에서 채무가 사라졌다. 둘째, 밤 열한 시부터 사람을 닮은 종이가 나타났다. 셋째, 누군가 이름을 불렀을 때 대답하면 위험하다. 넷째, 서강재라는 남자는 권리 원복을 요청했다. 다섯째, 아버지가 쓰던 망치에 괴물이 반응했다. 적고 나니 그럴듯한 조사 기록이 되었다. 그렇다고 사실이 납득되지는 않았다. 그는 사진을 찍어 놓은 망치를 확대해 봤다. 손잡이에 있는 낡은 흠집과 누렇게 굳은 접착제가 보였다. 다른 망치와 특별히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 망치는 방금 종이 괴물의 팔을 부쉈다. 우빈은 잠깐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가 거칠었다. 새벽 마트에서 젖은 상자를 나르고 냉장고 문을 하루에도 수십 번 열고 닫은 손이었다. "엄마. 나중에 나한테 또 화내도 괜찮으니까, 그냥 내가 누군지만 잊지 마요." 그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마지막 말이 조금 흔들렸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버지 사진을 찾아봤다. 반년 전 찍힌 사진이었다.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는 웃고 있었고, 우빈은 일부러 표정을 크게 지었다. 누군가 병원 사진에서까지 웃으려면 이유가 있어야 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서로가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휴대전화 화면이 검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사진 속 아버지 얼굴 위로 작은 검은 네모가 생겼다. 새 알림도, 경고음도 없었다. 우빈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문질렀다. 네모는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사건이 종이 한 장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혼자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응급실 구석에서 흰 운동화를 신은 여자가 다가왔다. 서른 언저리로 보이는 그녀는 노트북 가방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밤새 잠을 못 잔 듯 눈 밑이 거뭇했지만 시선만큼은 날카로웠다. "정우빈 씨? 김소라예요." "어떻게 여기로 왔어요?" "회수된 사람은 같은 병원으로 모이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통화 중에 들린 구급차 출동 안내를 검색했어요." 그녀는 명함 대신 접힌 인쇄물을 내밀었다. 금융사기 피해자 공동대응 모임이라는 글자 아래 열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섯 이름에는 검은 줄이 쳐져 있었다. "다 죽은 겁니까?" "아뇨. 더 이상 그 이름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가족이 알아보지 못하거나 주민등록은 남아 있는데 직장 기록이 사라졌죠. 그러다 한 달 뒤부터 정말로 없어졌어요." 소라는 서랍처럼 생긴 작은 금속 상자를 열어 보여줬다. 안에는 휴대전화 세 대와 낡은 수첩, 열쇠고리가 들어 있었다. "이 사람들 것이에요. 사라진 날짜와 금액을 적어 놨어요. 금고로 없앤 빚이 사람을 찾아갈 때마다 마지막 연락이 왔거든요." "경찰은요?" "아직 납득할 만한 설명을 못 찾았어요. 흔적이 남지 않으니까요." 우빈은 서강재의 명함을 꺼내 보여주었다. 소라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걸 어디서 얻었어요?" "집 앞에 그 사람이 왔어요. 금고를 들고." 소라는 명함을 손으로 잡지 않았다. "검은 양복에 장갑 낀 남자 맞아요?" "네. 이름은 서강재. 회수 담당자랬어요." "그 사람은 우리 모임에서 '빈칸'이라고 불러요. 사고 현장에 나타난 다음 사진에서 자기 자리만 지워지거든요." 그녀는 휴대전화 사진을 보여줬다. 사라진 사람들의 뒤편에는 사람 모양의 빈 부분이 있었다. 풍경이 찢겨 나간 듯 희었다. "금고 만든 사람입니까?" "아직 모르죠. 다만 금고가 만들어진 곳을 찾다가 그 사람을 세 번 봤어요. 매번 누군가 없어지는 날이었고요." 우빈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빈칸 뒤편에 보이는 간판이 낯익었다. '삼목 철공소'. 아버지가 예전에 공방을 차렸던 골목에 있던 가게였다. "여기, 어디서 찍었어요?" "성수동 오래된 공단이요. 지금은 다 철거됐어요." "저 골목에서 아버지가 일하셨어요." 소라가 처음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정태수 씨가 아버지예요?" "그 이름도 알고 있어요?" 소라는 수첩을 펼쳐 일련번호가 적힌 페이지를 보여줬다. [원형 금고 제작 관계자] [목재 외함 설계: 정태수] [채권 인식 장치: 도기철] [최종 승인: 서명 불명] 우빈은 가슴 한가운데가 비어 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가 보증 때문에 빚을 지고 병원에 누워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빚을 삼키는 기계를 만든 사람이었다. "이 기록을 어디서 얻었습니까?" "제가 당한 금융사기 회사의 압수 목록에서요. 서류상으로는 폐업한 연구소 자산이었는데, 어느 날 감정평가서가 전부 삭제됐어요. 저는 그전에 한 장을 복사해 뒀죠." 그때 어머니의 손목 숫자가 빠르게 줄기 시작했다. [04:58:03] [04:57:58] [04:57:41] 복도 끝에서 복사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문서 출력이 왜 필요할까 생각한 순간, 간호사 한 명이 길고 하얀 종이 뭉치를 끌고 나타났다. 종이는 바닥에 닿아도 더러워지지 않았고, 복도 모퉁이 너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소라가 우빈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거 보고 있으면 안 돼요. 사람을 확인하는 장부예요." 그녀는 간호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무릎을 꿇고 종이 끝에 붙은 숫자를 읽었다. [담보 이전 / 014 → 015] "받는 사람이 있어요. 누가 어머니의 수명을 대신 담보로 잡으려고 하고 있어요." 우빈은 종이를 밟았다. 얇은 종이는 순식간에 그의 신발 밑창에 달라붙었다. [추가 담보 후보: 정우빈] 대답하거나 서명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름이 나타났다. "이건 규칙에 어긋나는 거잖아요!" "맞아요. 그래서 원본이 필요해요. 원본의 조건이 바뀌고 있다는 뜻이니까." 소라는 노트북을 열어 사진을 하나 더 보여줬다. 오랜 세월 바랜 공방의 단체사진이었다. 젊은 아버지 정태수가 웃으며 서 있었다. 옆에는 도영식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가 금고 모형에 손을 얹고 있었다. "도기철. 도영식의 아버지예요." "도영식은 금고를 어디서 얻었다고 했죠?" "정확히 말하지 않았어요." "금고 일련번호를 확인해야 해요. 원래 제작사는 모든 제품에 짝이 되는 보관함을 뒀어요. 서류를 삼킨 금고가 있으면 반대쪽에는 그 서류의 그림자가 남아요." 우빈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계속 울렸다. 응답이 없자 그는 병동으로 직접 향했다. 소라도 뒤따랐다. 병실 문에는 아버지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 낯선 노인이 누워 있었다. 간호사는 정태수라는 환자가 처음부터 없었다고 말했다. 우빈은 차트를 빼앗듯 받아 들었다.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네모난 검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담보 선회수]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아버지였다. 그러나 전화를 받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우빈 씨. 아버지를 찾고 싶다면 내일 새벽 세 시까지 삼목 철공소로 오십시오." "누구십니까?" "당신 아버지가 서명한 계약의 남은 증인입니다." "아버지는 어디 있어요?" 한동안 들린 것은 망치질 소리뿐이었다. 정확히 세 번, 나무에 못을 박는 소리. "빚을 만든 사람은 금고 바깥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우빈은 손에 쥔 망치를 바라봤다. 아버지가 남겨 준 물건은 이제 유일하게 현실을 증명하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병동 복도를 돌아보았을 때, 바닥의 종이에는 방금 전까지 없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정태수 / 제작 채무 원금: 산정 불가] 그리고 그 아래, 우빈의 이름 옆에 어머니의 남은 시간이 나타났다. [03:00:00]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3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