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 도영식의 이름을 부른 순간, 골목의 가로등 세 개가 차례로 꺼졌다.
정우빈은 창틀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붙잡으려던 종이 손들이 일제히 밖으로 뻗었다. 도영식은 뒷걸음질을 쳤다. 낡은 구두 뒤축이 물웅덩이에 빠졌는데도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아닙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도영식은 검은 양복 남자를 향해 외쳤다. 남자는 대답 대신 손에 든 금고의 윗면을 눌렀다. 똑같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금고에는 희미하게 새겨진 숫자가 있었다.
[07 / 회수 전용]
현관문이 안쪽으로 굽었다. 종이 괴물이 문을 밀어낸 것이 아니었다. 괴물이 문짝을 통과하며 문에 적힌 제조번호와 보증기간을 갉아 먹고 있었다. 잉크를 잃은 철판은 녹슨 듯 부스러졌다.
"어머니! 창문 쪽으로 오세요!"
우빈이 외치자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니 이명숙은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나왔다. 손에 들린 휴대전화에서는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의 대기 음악이 흘러나왔다.
"네 아버지가 전화를 안 받아. 우빈아, 이게 무슨 소리야?"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지금은 제 손 잡아요."
지상으로부터 한 층 남짓 떨어진 창문 아래에는 낡은 분리수거장이 있었다. 우빈은 작업장에서 짐을 옮길 때 쓰던 로프를 창살에 걸었다. 매듭을 두 번 확인하고 어머니의 허리에 감았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매듭이었다. 목수에게 매듭은 멋이 아니라 살아서 내려올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창밖으로 몸을 내민 순간, 현관 쪽에서 누군가 말했다.
"명숙 씨, 연대 보증 확인 부탁드립니다."
어머니의 몸이 멈췄다. 그녀의 손등에 붉은 직인이 찍혔다.
[관계 확인: 배우자]
우빈은 어머니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대답하지 마세요. 무슨 소리가 들려도!"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대답하지 않아도 관계가 담보가 된다는 사실에 우빈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머니의 손등에서 붉은 줄기가 솟아 창문 밖으로 늘어났다. 그 끝은 도영식의 그림자가 아니라 골목에 놓인 검은 금고와 연결되어 있었다.
"창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추심선에 닿습니다."
검은 양복 남자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금고를 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을 펼쳤다. 금고가 철컥 열리자 안에서는 종이 한 장이 떠올랐다. 계약서처럼 보였지만 글자가 모두 반대로 인쇄되어 있었다.
[권리 원복 요청]
남자가 종이를 들어 보이자 괴물의 머리가 꺾였다. 종이 팔에서 두툼한 조각이 떨어져 검은 금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도영식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골목 끝으로 도망쳤다.
"잡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 사람이 시작한 일이에요!"
우빈이 외쳤다.
"시작한 사람과 빚진 사람이 같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남자는 어머니 손등의 직인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가족 연동까지 걸렸군요. 예상보다 빠릅니다. 아들을 먼저 내려보내세요. 부인이 혼자 움직이면 추심선이 따라붙습니다."
"당신은 누군데 그런 걸 아세요?"
"회수 담당자입니다. 이름은 나중에."
남자가 짧게 답했다. 그때 괴물이 금고 바닥에 떨어진 그림자를 잡아당겼다. 그림자가 사람처럼 일어서더니 남자의 발목을 감았다.
"젠장. 미회수 이자가 남았어."
남자가 낮게 욕했다. 그의 검은 양복 소매가 순식간에 낡은 영수증처럼 바스러졌다. 우빈은 본능적으로 손에 쥔 망치를 휘둘렀다. 망치 머리가 종이 팔을 통과할 줄 알았는데, 단단한 못을 친 것처럼 반동이 왔다.
쿵.
괴물 몸속에 박혀 있던 금속 스테이플러 심이 튀었다. 괴물이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연체'라고 말하는 소리였다.
"못에 맞았다고?"
우빈이 혼잣말하자 검은 양복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철이 아니라 고정된 약속에 반응한 겁니다. 그 망치, 누가 쓰던 물건입니까?"
"아버지요."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놀란 표정은 짧았지만 우빈은 분명히 보았다.
"정태수 씨 아들입니까?"
우빈은 대답을 잊었다. 낯선 남자가 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 순간 어머니 손등의 붉은 직인이 검게 변했다. 어머니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파…… 우빈아, 갑자기 숨이……"
회수 담당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시간이 없습니다. 누군가 채무자의 가족을 신규 담보로 등록했습니다."
그는 우빈에게 낡은 명함을 던졌다. 명함에는 회사명도 전화번호도 없었다. 검은 사각형 아래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회수자 서강재 / 임시 열람권 1회]
"이걸 가지고 병원으로 가십시오. 그런데 절대 제 이름을 서류에 적지 마세요."
"왜요?"
"적는 순간 저도 추심 대상이 됩니다."
우빈은 망치를 벨트에 끼우고 로프를 타고 내려갔다. 어머니를 등에 업은 채 골목을 빠져나갈 때 금고에서 터져 나온 불빛이 밤하늘을 하얗게 갈랐다. 뒤돌아보니 괴물은 사라져 있었다. 대신 남자가 서 있던 자리에 사람 그림자만 종이처럼 바닥에 붙어 있었다.
우빈은 어머니를 업고 큰길로 나왔다. 늦은 밤의 편의점 앞에는 두 사람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로 택시 한 대가 지나갔고, 도로 반대편에서 배달 기사가 휴대전화에 도착 확인을 누르고 있었다. 모두 너무 평범해서, 조금 전 자신이 본 것이 정말 현실인지 의심스러웠다.
"엄마, 조금만 참아요. 큰길이라 곧 차가 와요."
"괜찮아. 내려 줘. 네 허리 다치겠다."
명숙은 아픈 중에도 아들을 걱정했다. 우빈은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가 어머니 몸무게가 아니라 오래 함께 버틴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쓰러진 뒤부터 어머니는 병원비를 아끼려고 허리 통증을 숨겼고, 우빈은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야간 근무 시간을 말하지 않았다. 서로를 지키겠다고 숨긴 말들이 가족의 식탁 위에 쌓였다.
그런데 지금 명숙의 손목에는 여섯 시간이 적혀 있었다. 적어도 우빈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너 아까 도영식에게서 왔지?"
어머니가 물었다.
"네."
"그 사람도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어릴 때 네 아버지 공방에서 심부름하던 아이였지. 도 씨 아저씨가 자꾸 돈을 빌릴 때면 그 아이가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어."
"엄마, 그 이야기 지금 처음 들어요."
"우리가 그 집과 엮인 일이 오래됐잖니. 아버지가 잊어라 해서 말 안 했지."
우빈은 걸음을 멈췄다. 어머니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하는 듯했지만, 기억 한구석에서 중요한 것을 꺼내 놓은 눈빛이었다.
"그 애가 마지막으로 공방에 온 날은 겨울이었어. 검은 상자를 들고 왔는데 아버지는 그걸 안 받으려고 했단다."
"금고였어요?"
"글쎄. 손바닥만 했던 것 같은데. 자꾸 종이 소리가 났어. 네 아버지가 한밤중에 나무판을 태웠고, 나는 창문을 닫느라 바빴지."
우빈은 어머니 손등의 붉은 직인을 다시 살폈다. 직인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기억 하나가 무게를 지닌다면, 저 검은 금고는 어머니의 오래된 기억까지 빚으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택시가 멈췄다. 기사는 우빈이 어머니를 부축하는 것을 보고 뒷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기사가 내민 태블릿 화면 아래에는 순간 낯선 문장이 떠올랐다.
[후불 결제 시 관계 이관 동의]
우빈은 움찔했다. 그는 급히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를 꺼냈다.
"현금으로 드릴게요. 카드도, 앱도 안 쓸게요."
기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돈을 받았다. 화면 아래 문장은 곧 사라졌다. 우빈은 자신의 눈이 잘못된 건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호흡이 불규칙해져 그럴 여유가 없었다.
차창에는 우빈과 어머니의 얼굴이 나란히 비쳤다. 우빈은 문득 깨달았다. 몇 시간 전 자신이 바랐던 것은 빚 없는 삶이었다. 지금 바라는 것은 이 창문에 어머니의 얼굴이 계속 비치는 것, 그것뿐이었다.
병원 응급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깊은 잠처럼 눈을 감았다. 우빈은 간호사에게 그녀를 넘겨주며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었다. 간호사가 종이를 내밀자 그는 펜을 잡지 못했다.
"보호자 서명 좀 해 주세요."
문서에 서명하는 일이 이렇게 두려운 적은 없었다. 그는 먼저 화면과 종이를 끝까지 읽고, 동의란이 아닌 연락처 기재란에만 글자를 적었다. 간호사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재촉하지 않았다.
접수대에서 대기번호가 나왔다. 숫자는 18이었다. 우빈은 이상한 우연에 가슴이 철렁했다. 1억 8천만 원. 세상이 무엇을 보아도 그 돈이 먼저 떠올랐다.
그제야 우빈은 김소라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소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두 번 울리자 연결됐다.
"살아 있네요."
여자가 말했다.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숫자를 확인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이상해졌어요. 몸에 빨간 글씨가 생겼어요."
"연대 추심이군요. 원본 계약서 뒷면에 가족 이름이 있으면 그래요. 우빈 씨가 서류를 넣을 때 뒷면 확인했어요?"
우빈은 말을 잃었다. 그는 도영식에게 받은 확인서만 확인했지 아버지의 보증 계약서 뒷면까지 자세히 읽지는 않았다.
"도영식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예요?"
"그 사람은 금고를 아는 중개인이지 제작자는 아니에요. 더 위험한 건 따로 있어요."
"대체 뭐가요?"
전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소라에게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그녀가 작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금고는 서명된 빚만 먹어요. 그런데 누군가 서명하지 않은 가족 이름까지 넣었다면, 그건 채무가 아니라……"
전화가 끊겼다.
우빈의 휴대전화에 은행 알림이 떴다. 분명 사라졌던 대출 항목이었다.
[채무 0원]
[담보 제공자: 이명숙]
[담보 항목: 남은 수명]
[잔여 납부 기한: 06:00:00]
우빈은 어머니의 등을 다시 고쳐 업었다. 처음으로 돈보다 무서운 빚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스스로 갚을 수 없는 값을 가족에게 내게 하는 빚.
골목 끝에서 구급차 사이렌이 들렸다. 그런데 사이렌 소리 밑으로 사각사각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따라왔다. 누군가 새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 계약서에는 우빈이 기억하는 자신의 서명이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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