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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화
PAYLUA ORIGINAL · 제1화

1화. 영수증 없는 상환

빚을 먹는 금고 · 6,079자

오프라인 책장
정우빈은 빚을 미워했지만, 빚쟁이를 더 미워하지는 못했다. 빚을 갚으라고 찾아오는 사람은 대개 돈보다 급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우빈도 매달 남의 돈을 받아 생활했다. 동네 공방에서 목수로 일하던 아버지는 신용보증 한 번 잘못 섰다가 집을 잃었다. 어머니는 새벽 마트를 다녔고 우빈은 야간 물류센터에서 일했다. 가족의 빚은 1억 8천만 원. 은행 앱에 표시되는 액수보다 훨씬 무거운 숫자였다. 가끔은 숫자 자체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가슴을 눌렀다. "계약서 가져왔지?" 낡은 빌라 지하에서 도영식이 담배를 비볐다. 서른 중반쯤 보이는 사채업자는 다 낡은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손목시계만큼은 번쩍였다. 우빈은 비닐봉지에 넣어 온 서류를 꺼냈다. "원본입니다. 아버지 서명도 있고요." "잘 보관해야지. 이 종이 한 장이 너희 집보다 값진데." 그 말이 우빈에게는 협박보다 더 아팠다. 도영식은 봉투를 훑더니 검은 금고를 가리켰다. 사무실 구석에 놓인 작은 금고였다. 일반 금고와 달리 숫자 버튼도 열쇠 구멍도 없었다. 입구에는 우편함처럼 긴 틈만 나 있었다. "거기 넣어." "왜요?" "새 제도야. 채무 조정이라고 생각해." "고객 서류를 거기 보관한다고요?" "빚 없애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해." 우빈은 종이를 넣지 않았다. 사채업자의 친절은 언제나 대가가 있었다. 그런데 도영식의 표정이 점점 초조해졌다. 오히려 그쪽에서 서류를 넣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들어가면 진짜 없어집니까?" "내가 보증하지." "말로는 안 됩니다." 도영식이 비웃었다. "넌 아비 닮아서 피곤하구나." "약속을 종이에 써 주세요. 서명도 하고요." 한참 실랑이한 끝에 우빈은 '원본 소멸 시 채무 전액 면제'라는 확인서를 받아냈다. 도영식은 이상할 정도로 쉽게 서명했다. 우빈은 금고 틈에 계약서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철컥. 안쪽에서 누군가 종이를 씹는 소리가 났다. 사각, 사각, 사각. "분쇄기예요?" 우빈이 묻자 도영식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자신의 휴대전화 화면을 가리켰다. 우빈의 은행 앱에서 채무 항목이 사라지고 있었다. 원금, 이자, 연체료가 차례로 회색으로 변하더니 목록에서 삭제됐다. [보유 채무 0원] 우빈은 휴대전화를 들고도 믿지 못했다. "이게…… 무슨……" 도영식은 금고를 오래 바라봤다. 그 눈에는 돈을 잃은 사람의 분노보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두려움이 비쳤다. "집에 가. 그리고 오늘 밤은 가족이랑 같이 있지 마." "뭐라고요?" "들었으면 가." 우빈은 확인서를 챙기고 지하 사무실을 나섰다. 불빛이 깜빡이는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자꾸 등 뒤에서 끈적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우빈이 들어오자 어머니는 우빈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에 멍이 있는지, 옷이 찢어졌는지 확인하는 습관은 오래된 것이었다. "도영식이 또 뭐라고 했어?" "서류 정리만 했어요." "그 사람이 서류만 정리하겠니?" 어머니는 문 앞에 세운 우빈의 신발을 돌려 놓았다. 구두 밑창이 뜯어져 있었다. 새로 살 여유가 없어서 접착제로 붙여 왔는데, 지하실 습기에 다시 떨어진 모양이었다. 우빈은 괜찮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늘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늘 의사가 조금 좋아졌다고 했어. 근데 약이 하나 더 들어간대." 그 말에 우빈은 습관처럼 계산을 시작했다. 한 달 병원비, 월세, 남은 식비. 금액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옮겨 봐도 정답은 늘 마이너스였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앱에서 빚이 사라진 덕분에 계산에 처음으로 빈자리가 생겼다. 그 빈자리가 마음을 놓이게 하기는커녕 더 큰 불안을 만들었다. 우빈은 식탁에 앉아 병원에서 받아 온 영수증을 펼쳤다. 하나하나 날짜 순서대로 정리하다가 오래된 계약서 사본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보증을 섰던 사업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회사 대표 이름이 이상했다. 도영식. 지금 빚을 받아 가는 바로 그 사채업자의 이름이었다. "엄마, 아버지가 보증 서 준 사람이 도영식이었어요?" 어머니는 영수증을 쥔 손을 멈췄다. "그 이름 어디서 봤니?" "계약서에 있어요. 아버지는 친구 도와주다가 빚진 거라고 하셨잖아요." 어머니는 한참 말이 없었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식탁 위에 울렸다. "네 아버지가 도영식 아버지한테 신세를 많이 졌어. 예전에 작은 공방을 차릴 때 도와줬대. 그래서……" "그걸 빚으로 갚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그렇지." 우빈은 계약서 사본을 확대해 봤다. 맨 아래 특약사항에는 이상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실질 채무 책임은 보증인의 선택에 따른다.' 일반적인 대출 계약에서는 볼 수 없는 문구였다. 보증인이 자기 의지로 전부 떠안으면 원래 채무자는 책임을 면한다는 뜻일까. 우빈은 아버지 병실에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지만 우빈의 이름을 듣자 짧게 웃었다. "아버지, 보증 서신 계약서요. 그 돈 원래 누구 돈이었어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걸 왜 지금 묻니." "빚이 없어졌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침대가 삐걱거렸다. "우빈아. 그 종이 어디 있니?" "도영식이 준 금고에 넣었어요." 아버지는 가쁜 숨을 몇 번 내쉬었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금고만은 손대지 말라고 했는데." "누가요?" "그 애 아버지가. 오래전에." 전화가 끊겼다. 곧 병원 간호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아버지가 놀라 혈압이 올라갔으니 조금 쉬게 해 달라는 말이었다. 우빈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열한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우빈에게 미음을 떠먹으라고 했다. 그는 숟가락을 들었지만 입으로 옮기지 못했다. 냉장고 문에 붙어 있는 메모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건강할 때 써 둔 글씨였다. '빚은 사람이 만든다. 사람을 빚으로 만들지는 마라.' 우빈은 어릴 때 공방에서 아버지와 함께 못을 박던 일을 떠올렸다. 못이 삐뚤어지면 아버지는 억지로 두드리지 않았다. 먼저 빼서 나무가 왜 갈라졌는지 살폈다. 한 번 잘못 박힌 못은 깊이 박을수록 더 큰 금을 낸다고 했다. 자신의 가족도 꼭 그런 상태였다. 누군가의 빚이 잘못 박힌 못처럼 오래전부터 남아 있었고, 모두가 그 위에 새 빚을 덧박고 있었다. 우빈은 병원비 영수증을 접어 지갑에 넣었다.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돈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야?" "아직은 모르겠어요." 그는 처음으로 솔직하게 말했다. "아까는 끝난 줄 알았는데, 어쩌면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어머니는 우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작은 손길이 낯설 만큼 따뜻했다. "끝나는 방법을 찾으면 되지. 같이 찾자." 그날 밤 우빈은 현관 안쪽에 공구함을 가져다 놓았다. 막연한 불안 때문이었다. 분명 빚이 사라졌는데, 왜 도영식은 가족과 떨어져 있으라고 했을까. 왜 누군가 가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을까. 답을 찾기도 전에 집안의 시계가 열한 시를 가리켰다. 그날 밤 열한 시, 현관문이 세 번 두드려졌다. 톡. 톡. 톡. 우빈은 인터폰을 켰다. 화면에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 센서등은 켜져 있었고, 바닥에는 접힌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문을 열자 종이가 안으로 미끄러졌다. '1억 8천만 원.' 검은 잉크로 쓰인 숫자 아래에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계약서의 필체가 아니었다. 얇고 삐뚤빼뚤한 글씨. 어린아이가 따라 쓴 듯한 글씨였다. "누구세요?" 대답은 없었다. 우빈이 종이를 집어 드는 순간, 종이 아래에서 뭔가 꿈틀거렸다. 납작한 손가락 다섯 개가 종이의 가장자리에서 뻗어 나왔다. 손가락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처럼 얇았고, 관절마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 우빈은 종이를 떨어뜨렸다. 종이가 바닥을 구르며 몸집을 불렸다. 수십 장의 청구서가 한 장에서 펼쳐지고,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사람의 형태를 만들었다. 얼굴은 텅 비어 있었다. 대신 머리 한가운데 붉은 글씨가 찍혀 있었다. [채권 추심] 그것이 입을 벌렸다. "정…… 우…… 빈……" 기괴하게 늘어난 종이 손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우빈은 현관문을 힘껏 닫았다. 손가락 하나가 문틈에 끼어 찢어졌고, 찢어진 자리에서 새 종이가 자라났다. 안방에서 어머니가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 "문 열지 마요!" 우빈은 의자를 끌어와 현관문을 막았다. 바깥에서 철문이 종이에 문질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숫자들이 문 아래로 밀려들었다. 100,000. 250,000. 18,000,000. 떼를 지은 벌레처럼 숫자들이 바닥을 기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번호 표시 제한. "금고에 넣었죠?"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누구십니까!" "김소라예요. 나도 그 금고를 썼어요. 지금 종이가 문을 두드리고 있죠?" 우빈은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알았어요?" "우리 집에도 왔으니까. 빚이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종이에서 빠져나오는 거예요." 여자가 말했다. "서류에 붙어 있던 권리가 몸을 얻어요. 내가 갚아야 할 돈이 아니라, 나한테서 반드시 받아내야 한다는 명령이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절대 이름을 부르게 두면 안 돼요. 대답하면 집 안으로 들어옵니다." 문 밖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우빈아."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우빈은 안방 문을 돌아봤다. 어머니는 아직 안에 있었다. "우빈아, 이 문 좀 열어 주렴." 목소리는 현관문 너머에서 들렸다. 그것이 방금 어머니의 목소리를 흉내 낸 것이었다. 우빈은 이를 악물었다. "김소라 씨. 대체 어디서 이런 걸……" "나도 몰라요. 하지만 하나는 알아요. 그 금고를 만든 사람은 채무자보다 채권자를 더 싫어해요." 통화가 뚝 끊겼다. 현관문 손잡이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금속이 비틀리는 소리 끝에 손잡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빈은 어머니에게 다시 전화할까 고민했지만 휴대전화의 통화 기록이 이상했다. 방금 전 아버지와 통화한 기록이 사라진 것이다. 그 자리에는 '채권자 상담'이라는 항목만 남아 있었다. 그는 전화를 눌러 보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방에서 어머니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우빈아, 정말 괜찮은 거니?" "아뇨. 근데 아직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는 현관 앞 바닥에 그려진 숫자들을 내려다봤다. 어느 숫자도 똑같은 금액이 아니었다. 모두 빚에 붙었던 이자와 벌금이었다. 그동안 사람을 괴롭혔던 액수 하나하나가 종이 몸을 이룬 것이다. 우빈은 그 사실을 보며 이상한 분노를 느꼈다. 자신의 가족을 몇 년씩 짓누르던 돈이 이제 얼굴도 없는 괴물의 손끝이 됐다는 게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도망칠 수 있다면 오늘 밤을 넘기겠지만, 가족에게 누가 이런 빚을 떠안겼는지는 반드시 알아낼 것이다. 우빈은 공구함을 열었다. 아버지가 쓰던 망치와 송곳, 절연 테이프가 들어 있었다. 그가 망치를 쥔 순간 도어락 화면에 뜬 배터리 잔량이 0이 됐다. 현관문 틈으로 접힌 영수증 같은 것이 고개를 내밀었다. [최종 독촉] "대체 뭘 원해?" 우빈이 중얼거리자 그것이 움직임을 멈췄다. 종이 몸체의 글씨가 지워졌다가 새로 써졌다. [상환 방법: 타인의 채무를 인수하십시오.]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도영식이었다. "거기 있지? 나와. 빨리!" "지금 괴물이 문을 뜯고 있어요!" "알아. 그게 원래 네 빚이었으니까." "당신이 금고에 넣으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내가 구하러 왔다고. 어서 나와!" 우빈은 창문을 열었다. 지상 한 층 높이였다. 아래 골목에 도영식이 서 있었고,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우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검은 양복 남자의 손에는 같은 모양의 금고가 들려 있었다. "소유권을 확인하겠습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정우빈 씨. 그 괴물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당신에게 빚을 지게 한 사람의 것이죠." 그는 도영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영식 씨. 본인 명의의 악성 채권을 타인에게 떠넘긴 사실을 인정합니까?" 도영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현관에서 종이 괴물이 몸을 뒤틀었다. 조금 전까지 우빈의 이름을 찾던 글씨가 천천히 방향을 바꿨다. [추심 대상 변경: 도영식] 그리고 괴물이 뒤를 돌아 도영식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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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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