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원금고에 들어가는 통로는 전날과 달라져 있었다.
구륜우편집중국 뒤편의 화물 승강기는 여전히 녹슨 철문을 달고 있었지만, 문 위의 안내등에는 새로운 글자가 켜져 있었다.
[보호 약속 미이행 / 목격자 열람 통로]
서강재는 안내문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 문구는 처음 봅니다. 예전에는 회수 담당만 드나드는 길이었어요. 이제 피해자들이 읽은 원본 내용이 통로에 반영된 모양입니다.”
소라가 물었다. “통로가 바뀌었다는 게 좋은 일일까요?”
“그건 들어가 봐야 알겠죠. 다만 출입 기록에는 새로 서명하지 마세요. 이미 승인된 피해자 열람 경로만 사용합시다.”
승강기가 아래로 내려가자 낡은 모터에서 쇳가루 냄새가 났다. 철문이 열리고 어두운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 벽에는 색이 바랜 화재 대피도가 붙어 있었다. 다른 때와 달리 실제 건물의 모습을 흉내 낸 장식이 아니었다. 우빈이 대피도의 날짜를 확인하자 2001년 인쇄라는 작은 글씨가 보였다.
“2002년에 이곳으로 들어왔을 수 있어요.” 그가 말했다.
복도 끝에는 정태수가 갇혀 있던 관찰창이 있었다. 이번에는 정태수가 의자에서 일어나 있었다. 흰 머리칼 사이로 검은 글자가 조금씩 지워지고 있었다.
“우빈아. 원본을 확인했구나.”
“아버지, 이정민 씨가 2002년에 다시 여기에 들어왔다고 들었어요. 혹시 기억나세요?”
정태수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그 사람을 여기서 본 적이 있어. 그런데 날짜를 모르겠어. 이곳에선 어제가 스무 해 전이 되기도 하고, 스무 해 전 일이 방금 전 일처럼 보이기도 해.”
“그럼 실제로 만난 건지, 기록을 본 건지 구분이 안 된다는 거군요.” 소라가 말했다.
정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도 그분이 남긴 말은 기억해. 누군가를 안전하게 데려오는 일은, 데려온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데까지라는 말.”
소라는 눈을 감았다. 어릴 적 어머니가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손을 잡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안전하게 건너는 건 길을 건너는 사람만의 일이 아니야. 손을 잡은 사람도 같이 건너야지.’
벽 너머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아무것도 없는 벽면에 작은 다이얼 전화기가 나타났다. 유리처럼 투명한 몸체 속에서 종이 테이프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보존 음성 / 2002.06.12]
[증언 제공자: 이정민]
[재생 시 권리 이전 없음]
소라는 그 마지막 문구를 두 번 읽었다. 미결이 지금껏 내민 화면에는 언제나 선택 뒤의 대가가 숨겨져 있었다. 이번에는 시스템이 대가가 없다고 적었다. 그래도 믿는 것과 확인하는 것은 달랐다.
“녹음 파일만 재생하는 건가요? 누군가 응답하면 새 계약이 성립할 수도 있습니까?”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미결이 답했다.
“그러면 재생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겠어요.”
서강재가 외부 녹음기를 켰다. 전화기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듣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정민입니다. 이 녹음은 살아서 나오면 직접 설명하기 위해 남겨 둡니다. 내가 없어졌다고 누군가 내 딸 이름으로 서명하려 든다면 막아 주세요.’
소라는 그 자리에서 숨을 멈췄다. 여자의 목소리는 오래된 전자음 뒤에 가려져 있었지만 단어 끝을 조금 눌러 말하는 습관이 그대로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던 길은 배수실입니다. 1998년에 그 길을 열었어요. 그런데 본원 장부에는 아이들이 지금도 누군가의 인수를 기다리는 것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내가 2002년에 다시 들어온 건 그 기록을 없애려고 한 게 아닙니다. 실제로 무엇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보호가 끝난 아이들에게 새로운 빚이 생기지 않게 하려는 겁니다.’
녹음 사이로 쇳소리가 났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백재헌은 원본이 보관층에 있다고 했어요. 같이 와서 직접 보여 주겠다고요. 그러나 그 사람이 정말 백재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현장에서 그 사람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까.’
소라가 눈을 떴다.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모르는 것을 기록하고 있었다.
‘여기서 발견한 사실을 남깁니다. 구조자의 귀환 확인은 원래 보호 약속에 포함돼 있었어요. 이 항목은 내가 새로 추가한 게 아닙니다. 누군가 그 줄을 잘라 내고, 구조 비용을 채권으로 바꾼 거예요. 그리고 잘라 낸 조각을 금고에 따로 보관했습니다.’
녹음이 잠깐 끊겼다. 이어 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조각을 꺼내면 금고는 더는 누구에게도 자동으로 보호자 이름을 덧쓸 수 없습니다. 다만 조각이 있는 방은 사람의 실명을 요구합니다. 빈칸에 아무 이름도 넣지 않고 열 방법을 찾을 거예요.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소라야, 네가 내 대신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의 미완성 숙제가 아니야.’
전화기에서는 짧은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기억의 문을 여는 듯한 마지막 말.
‘널 사랑해. 그래서 네가 날 찾느라 네 삶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녹음이 끝나자 소라의 다리가 흔들렸다. 우빈이 다가가려 했지만 그녀는 손바닥을 펴 보였다. 잠깐 혼자 서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관찰창 안에서 정태수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어린 나래는 성인 나래의 손을 잡았다. 누구도 소라에게 울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한참 뒤 소라가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저 목소리는 엄마 같아요. 하지만 2002년에 녹음한 게 맞는지는 외부 자료와 확인해야겠죠.”
서강재는 파일의 길이와 재생 장치 번호를 적었다. “그리고 이 녹음이 끝나도 이정민 씨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알아요.”
그때 복도 가장 안쪽에 다른 유리창이 켜졌다. 안에서는 파란 소매가 천천히 움직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목에 길게 남은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보호 기록 보관자 / 응답 대기]
유리창 너머의 손가락이 바닥을 두드렸다.
세 번, 쉬고 두 번, 그리고 한 번.
소라는 손을 유리에 대지 않았다. 대신 크게 물었다.
“엄마라면,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나중에 이야기해요.”
그 말이 끝나자 유리창에 얼굴 대신 한 장의 종이가 붙었다.
‘나는 여기 있다. 하지만 혼자만 데리고 나가지 마.’
제44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