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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43화
PAYLUA ORIGINAL · 제43화

43화. 보호자 명부의 빈칸

빚을 먹는 금고 · 3,249자

오프라인 책장
“백재헌이 어머니와 함께 들어갔다고요?” 정우빈은 복지센터 앞 계단에서 목소리를 낮췄다. 회색 구름 아래로 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소라는 누가 듣고 있는지보다 자신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먼저 확인했다. “같이 갔다고 적혀 있을 뿐이에요. 서명이 진짜인지, 자의로 동행했는지, 그날 두 사람이 같은 장소에 있었는지는 따로 확인해야 해요.” 그녀는 수첩 사진을 서강재에게 보내고 원본은 박현정에게 돌려주었다. 우빈이 처음 만났던 소라는 돈을 되찾으려는 피해자였다. 지금의 소라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분노를 증거로 팔지 않으려는 사람이었다. 일행은 복지센터 2층 회의실에 모였다. D-01부터 D-13까지 적힌 수기 명부와 1998년 보호 약속 원본 사본을 비교했다. 원본에는 ‘강나래 외 1인’이라고만 적혀 있지만, 명부에는 그날 현장에서 구조되거나 다른 시설로 보내진 사람들이 추가돼 있었다. “강나래와 강민호가 처음 약속의 대상이고, 나중에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 더 늘어난 거네요.” 소라가 말했다. “그 사람들 때문에 빚이 불어난 것은 아닙니다.” 박현정이 선을 그었다. “실제 보호 지원은 비용이 들어갈 수 있지만, 지원받은 아이에게 무단으로 빚을 만들었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예요.” 수첩에는 특정 아이들 옆에 같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보호자 지정 보류] 서강재가 오래된 회사 용어를 기억해 냈다. “이걸 상용화하면서 ‘보증인 미확정’으로 바꾼 겁니다. 보호할 어른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를, 갚아야 할 사람의 이름이 비어 있는 상태처럼 처리했어요.” “그게 금고의 출발점이었군요.” 우빈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14,201건이 모두 같은 원본에서 나왔다는 증거를 확보했죠. 금전 대여가 아니라 보호 실패의 기록인데요.” 성인 나래는 페이지를 한 장씩 넘겼다. 열두 살 자신과 마주하는 일보다, 그 뒤에 살아온 모든 시간이 한 줄의 숫자로 바뀌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어린 나래는 성인 나래의 손목에 남은 화상 흔적을 보고 물었다. “아줌마는 그날 다친 거예요?” “아니. 스물네 살 때 식당에서 일하다가.” “그런 일도 있었어요?” “있었지. 너한테는 아직 오지 않은 일이지만, 내겐 정말로 있었던 일이야.” 어린 나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사고 당일의 열두 살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그 뒤의 시간을 기억한다. 두 사람 중 어느 쪽도 종이에 찍힌 도장 하나로 지워져서는 안 됐다. 그때 박선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난밤 아들 앞으로 다시 통지서가 왔다는 것이었다. 자동 청구는 보류 상태였지만, 병원 진료 창구에 낯선 ‘연대 보호비’라는 항목이 생성됐다고 했다. “실제로 돈이 빠져나간 건가요?” 소라가 물었다. ‘아뇨. 아직이요. 그런데 아들이 병원 가는 걸 무서워해요. 또 치료받으면 누구한테 부담을 주는 것 같다고요.’ 소라는 전화를 끊은 뒤 한참 말이 없었다. 시스템이 돈을 실제로 걷지 못해도 사람에게 죄책감을 심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더는 청구하지 못하게 막아야 해요. 그런데 무엇보다 아이가 치료를 거부하지 않게 해야겠어요.” 우빈은 자신의 어머니를 처음 병원에 데려갔을 때를 떠올렸다. 빚이 두려워 치료를 미루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빚을 없애려다 다른 이들에게 괴물을 보냈다. 금고가 원하는 선택은 언제나 비슷했다. 당장 중요한 사람 하나를 구하려면 나머지 사람의 이름을 담보로 쓰라는 것. 서강재가 수첩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원본 보호 약속의 남은 부분’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 아래 목록은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1. 구조 대상의 안전 확인] [2. 현장 목격 기록의 보존] [3. 구조에 나선 사람의 귀환 확인] 앞의 두 항목 옆에는 손으로 적은 증거 번호가 있었다. 세 번째는 비어 있었다. “이정민 씨는 자신도 보호 약속의 대상이라고 적었군요.” 서강재가 말했다. “아니요.” 소라가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자기 이름을 쓰지 않았어요. ‘구조에 나선 사람’이라고 했어요. 누가 구조하러 갔든 그 사람이 돌아왔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우빈은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는 수동 빗장을 걸었던 책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문을 열려고 애쓴 사람들의 기록은 서둘러 ‘구조 실패’라는 두 글자로 바뀌었다.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누구에게 청구할지를 찾아온 것이다. 회의실 창문이 덜컹거렸다. 복지센터 전등이 세 번 깜빡였고, 수첩 위에 길쭉한 그림자가 생겼다. 종이 가장자리에서 검은 잉크가 솟았다. 모양은 예전에 봤던 빚의 괴물과 닮았지만 덩치가 작았다. 마치 벌레들이 서로 붙어서 한 마리의 손을 만드는 것 같았다. [보호자 공란 탐지] [대리 보호자 자동 지정 대기] 그림자가 박선희의 통화 기록 쪽으로 기어갔다. 우빈이 망치로 내려치려 하자 소라가 막았다. “부수면 기록까지 없어질 수 있어요.” 우빈은 망치를 뒤집어 나무 손잡이로 수첩 옆을 받쳤다. 소라는 통화 기록이 찍힌 종이를 움직이지 않은 채 투명 파일을 덮었다. 서강재는 별관에서 발급받은 청구 보류 확인서를 괴물 앞에 펼쳤다.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보호자가 비어 있다는 사실이 새로운 채무를 만들 근거는 아닙니다.” 검은 손은 종이에 닿으려다 멈췄다. 소라가 휴대전화로 박선희에게 다시 연락했다. “선희 씨, 아드님이 치료받는 건 누구에게 갚아야 할 죄가 아니에요. 병원에 잘못 생긴 항목은 저희가 기록해서 함께 다투겠습니다. 원치 않으시면 이름은 공개하지 않아요.” 수화기 너머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괴물의 손가락들이 하나씩 풀어졌다. 사라지는 대신 종이 위에 떨어졌다. 검은 조각에는 채무 금액이 아니라 낯선 숫자가 적혀 있었다. [보호자 미지정 원본 조각 / 0003] 우빈이 숨을 삼켰다. 종이 괴물이 돈을 먹지 못하자 원래 문서의 일부가 드러난 것이었다. 그때 본원금고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에 발신자로 ‘미결’이 떴다. “정우빈 씨.” 이번 목소리는 처음보다 작았다. “제 장부에는 아직 한 사람이 보호자를 기다립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면, 저는 또다시 아무의 이름이나 넣게 됩니다.” “그럼 넣지 마.” 우빈이 답했다. “모른다고 기록해.” “그 상태를 유지할 권한이 제게 없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어 미결이 말했다. “원본을 세 부분으로 나눈 사람을 찾으십시오. 그 사람만이 마지막 칸을 비워 둘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서강재가 장혜숙의 수첩을 내려다봤다. 세 번째 항목 옆 필체는 이정민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오래전에 쓰였다가 지워진 작은 글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보호는 갚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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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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