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실에는 증인석이 하나뿐이었다.
긴 책상 뒤에 의자들이 있었지만 모든 의자에는 같은 이름이 붙어 있었다. '대표 증인.' 누가 앉아도 한 사람의 이름만 남게 만든 구조였다.
정우빈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소라도, 서강재도 그랬다. 박현정이 별관의 실제 접수 절차로 받은 진술서들을 순서대로 펼쳤다. 유리문 밖에서는 자료 제공에 동의한 피해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동 집행 재개까지 00:17:42]
천장 스피커에서 오미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우빈 씨, 대표 한 명을 지정하지 않으면 심사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규정입니다."
"어느 규정이죠?" 소라가 물었다.
"현행 심사 규정 제12항."
소라는 준비해 온 원본 실험 지시를 펼쳤다.
"1998년 규정에는 증거를 가진 피해자와 목격자 누구나 이의 신청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대표를 강제한 조항은 2008년 상용화 때 추가됐습니다. 그때 당신 계정이 사용됐고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오미령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 조항은 제가 추가했습니다."
그 순간 심사실의 모든 화면에 같은 문장이 떴다.
[상용화 규칙 작성자 진술]
[대표 지정 의무 근거: 사후 추가]
우빈은 숨을 골랐다. 오미령의 진술은 책임을 면해 주는 마법이 아니었다. 다만 시스템이 스스로 만든 규칙을 최초의 규칙인 것처럼 우기는 일을 막는 증거였다.
"그래도 하나는 필요합니다." 낯선 음성이 끼어들었다. "이의 신청 전체를 책임질 사람."
검은 장갑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앞서 보관실에서 만났던 그 남자였다. 이번에는 사원증을 숨기지 않았다.
[백재헌 권한 대행 / 심사 보조]
"백재헌 씨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빈이 물었다.
"권한은 유효합니다. 사람이 없어도 절차는 남습니다."
"사람이 없는 권한으로 사람을 심사한다는 거군요."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얇은 종이를 올려놓았다. '신청인 전체 책임 확인서.' 서명하면 모든 증언의 수령자가 한 사람으로 합쳐진다고 쓰여 있었다.
우빈은 그 종이에 손대지 않았다.
"저희는 이미 별관에 각자 진술서를 접수했습니다. 저 종이에 서명할 이유가 없어요."
"그럼 자동 집행을 감수하셔야죠."
소라가 박현정을 바라봤다. 박현정은 접수 장부를 테이블에 올렸다. 종이 장부에는 각 사람이 제출한 날짜와 시각이 따로 적혀 있었다. 접수인은 누구의 채무도 인수하지 않았다. 맡은 것은 자료의 보존과 전달이었다.
"저는 자료가 접수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사의 판단은 별개의 일입니다." 박현정이 말했다. "다만 제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료를 없앨 수는 없어요."
시계가 12분을 가리켰다.
우빈은 첫 번째 증거를 꺼냈다. 1998년 사고 당시의 보호 약속 원본. '강나래 외 1인을 무사히 인도할 것.' 돈을 빌렸다는 문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뒤에 붙은 '채무로 전환' 도장만 다른 시기에 사용된 형식이었다.
소라는 두 번째로 삭제 이력을 제출했다. 세 시 십사 분의 이정민 계정 접속과 그보다 먼저 발급된 임시 접근표. 접속 기록이 그녀의 실제 행동을 입증하지 못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세 시 십오 분, 이정민이 목격 기록을 보존한 기록.
서강재는 세 번째로 시설물 D-2를 보여 주었다. 정태수가 만들었다고 인정한 수동 빗장과 다른 제작 방식의 원격 잠금장치. 누군가 새벽 세 시 십삼 분에 장치를 가동했다는 사실은 부품과 일치했다. 누가 가동했는지는 추가 확인이 필요했다.
네 번째 증거는 장혜숙의 수기 수첩과 D-07 생존 이송 기록이었다. 당시 아이가 반드시 그 장소에 있었다는 최종 확인은 남겨 두되, 문 안에서 곧바로 사라졌다는 시스템의 단정과 모순되는 생존 흔적이었다.
마지막은 피해자들의 개별 진술이었다. 박선희의 아들은 돈을 빌린 적 없었고, 배달 기사는 그날 일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피해에 동일한 원본 번호가 붙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스피커가 지직거렸다.
[원본 검증 진행]
[채권 형태: 금전 대여 계약?]
[원본 내용: 보호 이행 약속]
[불일치]
"이건 금전 채권이 아닙니다." 소라가 말했다. "나중에 생겨난 청구서는 이 보호 약속에서 정당하게 파생됐다는 근거가 없어요. 누군가 1998년의 실패를 돈으로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바꿨습니다."
검은 장갑의 남자가 소리쳤다.
"그때 실제로 사람을 구하지 못했잖습니까! 누군가는 책임져야죠!"
"맞습니다." 우빈이 대답했다. "문을 잠근 사람에게는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어요. 아이를 방치한 사람에게도요. 원본 기록을 지운 사람도 조사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 열네 천 명에게 빚이 생기지는 않아요."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책임을 없애 달라는 요구에는 익숙하지만 책임의 종류를 정확히 구분해 달라는 요구에는 답이 없는 얼굴이었다.
화면에 정태수의 영상이 나타났다. 아버지는 제1증인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쓴 짧은 진술서를 읽었다.
"내가 잠근 첫 번째 빗장은 내 책임입니다. 그걸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이유로 누군가 강나래와 강민호의 보호 약속을 돈의 빚으로 바꿀 권리는 없습니다. 내가 한 일을 제대로 심사해 주십시오. 남들이 갚아야 할 빚으로 만들지 말고."
우빈은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가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변명하지 않는 목소리를 들었다.
[자동 집행 재개까지 00:03:11]
전광판이 푸르게 바뀌었다가 다시 붉어졌다. 누군가 원본 확인을 중지시키려는 듯 화면 아래 명령문이 빠르게 올라갔다.
[백재헌 권한 대행 / 긴급 기각 요청]
[사유: 증인 대표 부재]
박현정이 접수 장부를 들어 올렸다.
"대표가 없으니 접수가 없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 접수 번호가 전부 있습니다."
서강재가 덧붙였다.
"그리고 원본 규정에는 대표 한 명을 세우라는 문장이 없습니다. 사후에 만들어진 권한으로 원본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미결의 목소리가 천장 스피커에서 들렸다. 다른 때보다 느렸다.
"원본이 보호 약속이라면…… 저는 누구에게 얼마를 청구해야 합니까?"
"아무에게도 청구하지 마." 우빈이 말했다. "누가 아이를 보호했는지, 누가 방해했는지, 먼저 사실을 확인해. 그건 청구서를 만드는 일과 달라."
짧은 침묵이 흘렀다. 미결의 검은 글자들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흩어졌다.
[원본 00-000001 / 금전 채권 해당 여부 미입증]
[파생 자동 청구 14,200건 / 집행 보류 유지]
[부당한 계약 전환 의혹 / 원본 보존]
[책임 개별 심사 필요]
우빈은 무릎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청구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피해자들의 이름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당장 자동으로 사람을 붙잡으려던 집행은 다시 멈췄다. 이번에는 한 사람이 모든 빚을 떠안아서 얻은 정지가 아니었다.
검은 장갑의 남자는 사원증을 쥐고 한 걸음 물러났다. 사원증에 찍힌 백재헌의 이름이 흐려졌다. 그 대신 백지 한 장이 나타났다.
[원본 심사 기록 외부 송부 완료]
[보존 대상: 최초 결재 문서 및 개인별 진술]
소라는 파일을 여러 저장매체에 복사해 둔 것을 확인하고, 박현정에게 원본과 사본의 보존 상태를 다시 물었다. 이 사건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안심됐다. 누구도 오늘 하루에 사람의 인생 전체를 정산할 권한을 얻지 않았으니까.
본원금고의 관찰창에서는 두 나래가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 나래가 유리 위에 손바닥을 대자 성인 나래도 손을 맞댔다. 유리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통화가 연결됐다. 둘은 이제 기록이 아니라 서로에게 질문할 수 있었다.
"민호를 찾으면 뭐라고 할 거예요?" 아이가 물었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성인 나래가 답했다. "그다음엔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듣겠다고."
그날 오후, 우빈은 병원 앞 벤치에 앉아 어머니가 좋아하던 귤을 샀다. 아버지를 당장 데려올 수는 없었다. 누가 마지막 쇠사슬을 걸었는지, 백재헌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정민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금고를 처음 사용하던 밤과는 달랐다. 그때는 자신의 빚만 없어지면 세상이 가벼워질 줄 알았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무겁게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우빈은 전화를 받기 전에 발신 번호를 기록하고 소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다시는 혼자서 새 계약 같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여보세요."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정우빈 씨죠. 저는…… D-07로 불리던 사람입니다."
우빈은 똑바로 앉았다.
"강민호 씨입니까?"
"그 이름으로 산 지 오래됐습니다."
상대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전화기 저편에서는 병원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들렸다.
"제가 먼저 연락드린 건 부탁이 있어서예요. 누나가 아직 살아 있다면, 제가 만나러 가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에게도 제 생활 이름을 알려 주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본인이 허락하기 전에는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남자는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하나 더요. 정태수 씨가 잠갔던 문, 누가 마지막으로 열었는지 아직 모르시죠?"
"알고 계세요?"
"네. 그 사람 손을 제가 잡고 나왔으니까요."
우빈이 일어섰다.
"누구였습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라 씨 어머니요. 이정민 씨가 저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어요. 누나를 찾겠다고."
통화가 끊겼다.
우빈은 손바닥에 남은 망치의 무게를 느꼈다. 처음으로 그 망치가 금고를 부수는 도구가 아니라, 다시 열어야 할 문 앞에 놓일 물건처럼 느껴졌다.
그때 본원금고에 새 표시가 떠올랐다.
[보호 약속 미이행 1건]
[미귀환 구조자: 이정민]
[마지막 출입기록 열람 가능]
우빈은 소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라 씨. 어머니를 찾을 단서가 생겼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누구의 이름도 대신 쓰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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