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일까지 열두 시간이 남았을 때, 소라는 피해자들에게 연락을 보냈다.
그녀는 모든 사람의 정보를 한곳에 모으자고 하지 않았다. 누구든 자신에게 온 서류가 이상하다면 원본을 보관하고, 발행 시각과 청구 이유를 확인하고, 스스로 원할 때만 진술하자고 했다. 누군가의 사연을 공개하는 것 역시 동의가 필요한 일이었다.
가장 먼저 답장을 준 사람은 제2정산소에서 만났던 박선희였다.
'저희 아이한테 또 종이가 왔어요. 병원비를 대신 갚아 준 사람이라는 이유로 이름을 올렸대요. 그런데 제 아이는 치료받은 것뿐인데요.'
그다음은 배달 기사였다.
'제 실수로 누군가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청구서가 왔어요. 그날 전 일도 안 했습니다. 휴대전화 근무 기록이 있어요.'
세 번째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소라는 그 요구를 존중했다.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날짜와 발행 번호만 비교했다.
세 사람의 사정은 달랐지만, 청구서 맨 아래에는 같은 글씨가 있었다.
[원본 발행번호: 00-000001]
서강재가 고개를 저었다.
"돈을 빌린 거래가 아닌데 같은 원본 번호를 복사한 겁니다. 원본이 보호 약속이었다는 점이 인정되면 최소한 이 번호에서 파생된 자동 청구는 재검토해야 합니다."
"그걸 누가 인정해 주죠?" 우빈이 물었다.
"바로 그 문제예요. 심사위원회가 미상채권관리의 옛 권한표를 그대로 쓰고 있다면, 우리 증언을 접수하더라도 기각할 수 있습니다."
박현정은 별관에 남아 있는 자료 공개 절차를 알려 주었다. 원본 사건과 관련된 자료는 피해자 대조 절차로 열람할 수 있지만, 그걸 바로 전면 공개하려면 개인 정보와 확인되지 않은 혐의를 구분해야 했다. 그녀는 기록보존사이지 판사가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분명히 했다.
"날짜와 발행 번호가 동일하다는 사실, 문서 원본의 일부가 사후에 바뀌었다는 사실은 공개 가능한 범위에서 증명하겠습니다. 누가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별도로 조사받아야 해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소라가 말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모든 사람을 대신한 판결이 아니라, 멈춰야 할 이유니까요."
서강재는 자기 사원증을 탁자에 올렸다. 검은 글자가 어렴풋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서강재에게는 같은 문자가 반복해서 오고 있었다.
'퇴사 거부권 행사 시 가족에게 잔여 책임 이전.'
우빈이 말했다. "강재 씨, 내 명의로 올려요. 제가 대표 신청자잖아요."
서강재는 오랜만에 크게 화를 냈다.
"그 말 하지 마세요. 우빈 씨가 제 동생 대신 책임지겠다고 하면 그게 금고가 원하는 일이에요. 내 이름은 내가 지킬 겁니다. 다은이 이름도 다은이에게 돌려줘야 하고요."
우빈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도 모르게 가장 쉬운 선택을 반복할 뻔했다. 누군가의 빚을 떠안아 당장의 눈앞에서 지워 주는 일. 선의를 붙인다고 방식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미안합니다."
"사과받으려는 건 아닙니다. 같이 끝까지 확인해 달라는 겁니다."
서강재는 자신의 근무 계약서와 회사가 무단으로 갱신한 기록을 분리해 놓았다. 정식 퇴사 의사를 밝힌 기록, 명의 도용으로 보이는 안내문, 다은의 동의가 없는 가족 담보 설정. 어느 것도 한 장의 '미정산'이라는 글자로 뭉개지 않도록 했다.
그 사이 성인 나래에게서 새로운 자료가 도착했다. 박현정이 확인한 별관 기록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해 주자, 성인 나래가 자신의 옛 상담 기록을 정식으로 요청해 받아 온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삶을 증명하는 몇 장의 사진과 메모를 함께 보냈다. 학교에서 친구와 찍은 사진, 첫 월급 봉투, 수선한 코트 사진. 그 속에는 아이 나래가 알지 못하는 수십 년이 있었다.
'저 아이의 기억을 빼앗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제 삶을 사본이라고 취급하지도 마세요.'
소라는 그 문장을 증언 목록 첫머리에 옮겼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산 사람이 둘이라는 사실은 기계의 분류 방식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분류하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둘 중 하나를 없애서는 안 됐다.
심사 전날 밤, 우빈은 병원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명숙은 낮에 비해 목소리가 또렷했다. 간호사가 가족사진을 침대 곁에 두었다고 했다.
"우빈아. 아버지는 찾았니?"
"목소리를 들었어요. 그런데 아직 돌아오시진 못했어요."
"그 양반은 자기가 실수한 걸 평생 숨기려 들더라. 못을 삐뚤게 박아도 혼자 밤새 고치곤 했어."
"이번엔 혼자 고칠 수 없는 일이에요."
어머니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그럼 혼자 하게 두지 마라. 대신 책임지라는 말이 아니라, 그 양반 입으로 진실을 말하게 옆에 있어 줘."
우빈은 눈을 감았다. 진실을 듣는 일은 아버지를 용서하겠다는 약속이 아니었다. 그러나 말할 기회마저 빼앗는다면 또 다른 침묵이 생길 것이다.
통화가 끝난 뒤 우빈은 마지막 증언 파일의 이름을 바꿨다.
'정태수_자백'이라는 한 단어 대신 '정태수_본인 진술_구조지연 및 제2잠금 미확인.'
소라가 그를 바라봤다. "잘했어요. 이 사건은 한 줄로 적을 수 없어요."
새벽, 별관의 심사실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자료 제출에 동의한 피해자들과 기록보존사, 장혜숙, 도기철이 도착했다. 도기철은 수척해 보였지만 새로 작성한 자필 진술서를 들고 있었다.
"상용화한 건 나야. 빠져나가지 않겠어." 그가 말했다. "다만 처음부터 책임을 팔기로 결정한 사람이 누구인지 끝까지 확인해 줘."
심사실의 전광판이 켜졌다.
[자동 집행 재개까지 00:20:00]
[대표 증인 1인 선택]
우빈은 전광판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대표 한 명은 없습니다. 증언자는 각자의 이름으로 여기 있어요."
전광판의 첫 줄에 붉은 오류 표시가 떴다.
[신청 형식 불일치]
그때 박현정이 별관의 수기 접수 도장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각 진술서에 접수 시간을 하나씩 찍기 시작했다.
도장 소리가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이어졌다.
금고는 그 소리를 청구서로 바꿀 수 없었다.
제3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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