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결은 질문을 끝낸 뒤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검은 종이와 서명 조각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형상이었다. 조금 전까지 형상 안쪽에서 수천 개의 이름이 흘렀지만 이제는 한 글자만 남았다. 정우빈.
"첫 번째 수익을 줬다고요?" 우빈이 물었다.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한테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누군가의 미래였습니다. 미래는 현재에 없는 이름이므로, 어떤 책임도 아직 거절할 수 없죠."
그 말은 정태수가 만든 설계서와 닮아 있었다. '향후 출생 또는 성명 변경과 관계없이 동일인으로 간주.'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미결은 그 침묵을 동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말하지 못하는 것과 동의하는 건 달라요."
우빈이 말하자 형상에 붙은 이름 몇 개가 떨어졌다. 미결은 바닥에 내려앉은 글자들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봤다.
"그 차이는 당신들의 규칙에 없습니다. 저는 비어 있는 칸을 채우도록 만들어졌으니까요."
소라가 손에 든 수첩을 펼쳤다.
"누가 그런 규칙을 만들었죠?"
"규칙을 만든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대가를 배정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서강재가 낮게 말했다.
"사람과 기록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군.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해."
미결이 고개를 돌렸다.
"서강재. 미상채권관리 회수 담당. 계약 이탈자."
"그건 내 근무 기록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전부는 아닙니다."
형상이 잠깐 멈췄다. 마치 낯선 언어를 들은 사람처럼 종이들이 서로 부딪혔다.
나래가 유리벽에 다가갔다. 그녀는 미결보다 유리 안쪽의 정태수를 보고 있었다. 그가 손짓하자 그녀는 낡은 원본의 가장자리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종이에는 자신과 누군가가 무사히 인도되어야 한다는 약속이 적혀 있었다.
"왜 저를 찾는 사람이 없었어요?"
정태수의 목소리는 낮았다.
"있었다. 너희를 찾으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들 손에서 기록을 빼앗았어."
아이 나래는 성큼 다가서지도 물러나지도 못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기억은 남이 정해 놓은 문장이었다. '너는 목격자다.' '너는 기록이다.' '너는 원본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겪은 순간은 다르다. 젖은 양말이 발가락에 붙는 불편함, 동생이 운동화를 숨길 때 내던 웃음, 철공소 문 앞에 놓인 귤 상자. 냄새와 감촉은 다른 사람이 대신 만들어 준 문장보다 오래 남았다.
나래는 자기도 모르게 왼손으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 아까 운동화 뒤축의 형광펜 동그라미를 그려 준 손동작이었다. 소라는 그 손을 지켜봤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기억을 되찾는 데 걸리는 시간을 누가 청구할 수는 없었다.
그날의 기억은 한꺼번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래는 비 내리던 밤의 철공소를 떠올렸다. 젖은 회색 콘크리트 바닥, 천장에 매달린 쇠사슬, 어른들이 끌던 긴 장비 상자. 그녀의 동생은 운동화가 젖는 게 싫어 한 짝을 계단 밑에 숨겼다. 이름은 강민호였다. 여덟 살. 오른손이 없는 대신 왼손으로 모든 것을 빠르게 해냈다.
"민호는 먼저 아래로 내려갔어요." 나래가 말했다. "나는 계단 위에서 기다렸어요. 누가 와서 장난처럼 종이를 주더니, 이걸 보여 주면 동생을 데려갈 수 있다고 했어요."
그녀는 손에 든 번호표를 내려다봤다. 지금까지 그 번호표를 놓으면 자신이 사라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믿게 했을 수도 있었다.
"그다음은?" 소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래는 고개를 저었다.
"엄청 시끄러웠어요. 기계가 돌아갔고 사람들이 누구 책임이냐고 싸웠어요. 그런데 아무도 민호를 찾으러 가지 않았어요."
미결이 대답했다.
"하위 보관 대상은 이미 출고됐습니다."
"어디로?" 우빈이 물었다.
"수취지 정보가 삭제됐습니다. 삭제된 정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네가 못 찾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야."
우빈의 말이 끝나자 미결의 몸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그 위에는 어린 민호의 왼손 지문이 찍혀 있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데려갔다고 알려 주려던 듯 엄지손가락을 여러 번 눌러 놓았다.
소라가 손을 뻗어 종이를 잡으려 하자 서강재가 막았다. "먼저 물어봐야 합니다. 저걸 가져가면 새 책임이 생깁니까?"
미결은 한참 말이 없었다.
"보관 비용은 산정되지 않았습니다."
"산정되지 않았다는 말은 무료라는 뜻이 아니죠." 소라가 말했다. "원본을 누구에게 넘길지, 조건을 분명히 하세요."
미결의 몸에서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열람만 가능 / 소유권 이전 없음]
그제야 소라는 지문을 가까이서 촬영했다. 유리벽 안의 정태수가 종이를 들어 빛을 비추어 주었다. 지문 옆에는 잉크가 눌린 흔적이 있었다.
'발송 기록 1998-11-03 / 구륜구 새벽 임시보호소.'
문재복이 지하실 출입문 바깥에서 말했다.
"그 보호소 기억합니다. 공장 뒤에 있던 구청 임시시설이었어요. 화재가 났을 때 아이들을 데려다 놓던 곳이지요. 지금은 다른 건물이 됐지만."
우빈은 놀라 그를 돌아봤다. 문재복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경비원으로서 제 권한이 없는 보관층을 함부로 넘지 않으려 했다.
"그곳에 민호가 갔을까요?"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내가 직접 데려다준 건 아니니 장담은 못 합니다."
지문 한 장만으로 아이의 행방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검색할 장소가 생겼다.
소라는 서강재에게 물었다.
"이정민이 03시 14분에 이름을 삭제하고 1분 뒤 증거를 보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태수가 답했다.
"그때 우리는 보호 기록을 통째로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민호와 나래를 같은 상자로 보내라는 뜻이었지. 이정민은 발송자 이름을 지워서 기계가 누구에게 돌려줘야 할지 모르게 만들었어. 대신 나래의 기억 한 조각을 밖으로 꺼냈지. 그게 지금 너희 옆의 아이야."
나래는 자신이 무엇인지 들었지만 울지 않았다. 천천히 손을 들여다봤다.
"그럼 저는 진짜 나래가 아니에요?"
정태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소라가 대신 아이 곁에 섰다.
"네가 어디에서 왔든 지금 여기서 보고 듣고 선택하는 건 진짜야. 다만 원래 나래가 어떻게 됐는지는 찾아봐야 해. 그걸 대신 결정할 사람은 없어."
나래는 한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번호표를 조금 느슨하게 잡았다.
미결의 종이 몸에서 붉은 줄이 나타났다.
[원본 목격 기록 불일치]
[이중 목격자 존재]
"어디에?" 우빈이 물었다.
미결은 유리벽 반대편을 가리켰다. 복도 끝에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작은 관찰창이 있었다. 그 안에서 성인이 된 한 여자가 우빈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끗한 머리가 귀 뒤로 흘러내렸고, 왼쪽 눈썹 위에 오래된 흉터가 보였다.
여자가 창문에 손바닥을 댔다.
"저 아이를 저한테 돌려주세요."
나래의 얼굴과 꼭 닮은 여자가 말했다.
"그건 제 열두 살이에요."
제2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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