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생 손 얘기를 누가 알려 줬죠?"
나래는 열린 우편함을 똑바로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조잡하게 대답하던 목소리는 사라졌다. 대신 편지 봉투 사이에서 마른 기침이 들렸다. 어린아이의 기침이었다.
"모르겠어." 목소리가 말했다. "나도 네가 누군지 다 잊었어. 근데 내가 이 말을 해야 하는 건 알아. 오른손은 그날 다친 게 아니야."
우빈은 나래가 달려가지 못하게 막으면서도 손목에 힘을 주지 않았다. 아이에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걸 잊고 싶지 않았다.
"어떤 기억이 있어?" 그가 물었다.
"비 오는 날. 문 앞에서 누나가 나보고 기다리라고 했어. 내가 젖은 운동화를 숨겼지. 엄마한테 혼날까 봐."
나래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운동화를 숨긴 곳은 어디야?"
"화물 계단 세 번째 밑. 사람들이 무거운 걸 끌고 다녀서 거긴 잘 안 봤거든."
문재복이 계단 쪽을 돌아봤다. 사람 손으로 만든 계단은 아직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는 손전등을 켜고 먼저 이동했다. 세 번째 계단 아래에는 조그만 틈이 있었다. 우빈이 망치의 뾰족한 끝으로 덮개를 살살 들어 올리자 먼지에 덮인 운동화 한 짝이 나왔다. 신발 뒤축에는 형광펜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나래가 숨을 삼켰다.
"그건 내 동생 거예요. 내가 그려 줬어요."
소라가 사진과 현장 위치를 기록했다. 신발 안쪽의 글씨는 대부분 지워졌지만 '강' 자 한 글자가 남아 있었다.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신발을 함부로 닦지 않았다.
"이건 진짜 단서야." 소라가 말했다. "목소리가 알려 준 장소에서 실제 물건이 나왔어. 그래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더 확인해야 해."
우편함 안에서 조용한 웃음이 들렸다.
"누나가 나를 의심하네. 잘했어. 아빠가 항상 모르는 사람이 이름 부르면 바로 따라가지 말라고 했잖아."
나래는 울면서도 웃었다. "너는 그 말을 한 번도 안 들었잖아."
사소한 말다툼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스물여덟 해를 잠깐 지웠다. 하지만 우편함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빈은 나래에게 당장 손을 넣지 말자고 했다.
"네가 잃었던 걸 되찾는 길이 이것뿐이라는 증거는 없으니까."
그때 천장의 대형 화면이 켜졌다. 도시 곳곳의 상담 천막이 보였다. 사람들은 무료 채무 구제를 기다리며 긴 줄을 서 있었다. 신용회복 지원, 긴급 생활비 보전, 가족 채무 안심서비스. 이름만 다른 광고들이 같은 확인 버튼을 내밀고 있었다.
[전 국민 채무 안정화 특별 조치]
[신청 기한 24시간]
[원본 이의 신청권 자진 포기 시 즉시 부담 0원]
"이건 또 뭐죠?" 소라가 소리쳤다.
서강재는 화면의 작은 글씨를 읽었다. "원본 조회를 포기하면 현재 부담을 없애 준다고 합니다. 그런 대신 제삼자에게 이전된 책임의 출처는 영원히 따질 수 없게 됩니다."
"그걸 누가 신청하겠어요?"
문재복이 조용히 말했다.
"많겠지요. 당장 집세가 밀리고 병원비가 급한 사람이라면 오늘 살 길부터 찾으니까."
우빈은 화면 속 줄 맨 앞에 선 젊은 남자를 보았다. 작업복 오른쪽 소매가 찢어진 남자는 종이를 손에 쥐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번 달 월급 전까지만 버티면 되는데.' 그 뒤에는 유모차를 민 여성이 있었다. 여자는 아이가 울자 종이를 입에 물고 가방에서 젖병을 꺼냈다. 화면 밖에 있다면 우빈도 그 줄에 섰을 것이다.
"사람들이 왜 눌렀는지 알아요." 그가 말했다. "문제는 누른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소라는 화면의 광고 문구를 확대했다. 굵은 글씨는 0원, 작은 글씨는 권리 포기였다. 누군가 읽기 어렵게 줄여 놓은 문장이야말로 계약의 진짜 내용이었다.
말을 잇지 못한 우빈은 예전의 자신을 생각했다. 금고 앞에 섰을 때 누구에게 일이 넘어갈지 알았더라면 정말 사용하지 않았을까. 어머니의 병원비와 집의 압류 통지서가 머릿속에서 동시에 떠올랐다. 쉬운 선택을 한 사람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선택 앞에 몰렸는지 밝혀야 한다는 것을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
우빈은 소라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동의 버튼을 누르기 전에 원본 조회가 무슨 뜻인지 알려야 해요."
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2정산소에서 받은 사람들의 연락처를 열었다. 개인정보를 함부로 공개하지 않고, 메시지 수신을 허락한 이들에게만 연락했다.
'지금 뜨는 특별 조치에 원본 조회 포기 조항이 있습니다. 계약 전 내용을 보관하고, 독립적으로 상담을 받으세요. 모르는 책임을 대신 맡겠다고 서명하지 마세요.'
박선희가 곧바로 답장을 보내 왔다. 아직 아이 약을 챙기는 손이 떨리지만, 근처 상담 천막에서 무료 지원을 신청하려던 친구를 말렸다고 했다. 다른 몇 명도 자신이 받은 서류를 사진으로 보내 왔다. 거기에는 같은 주소와 동일한 문구가 있었다.
서강재는 봉투 분류기에 작은 수기 전표를 넣었다. 이곳의 기계를 움직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신청서에 같은 원본 번호가 찍히는지 확인하기 위한 비교였다. 그는 새 계약은 체결하지 않았고, 이미 존재하는 서류의 인쇄 번호만 조회했다.
모든 전표에서 같은 숫자가 나왔다.
[원본 발행번호: 00-000001]
"이렇게 많아도 최초 서류는 한 장이에요." 그가 말했다. "14,201건이 서로 다른 거래처럼 보이지만, 다 한 장의 비어 있는 서류를 복사한 결과죠."
소라가 물었다.
"도기철의 자백 한 건으로는 왜 멈추지 않았죠?"
"그건 상업용 발행 사실 하나를 인정한 거니까요. 최초 서류가 원래부터 존재할 수 없는 채무라는 걸 입증해야 합니다."
그때 도기철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회사 밖으로 나와 있었다. 목소리 뒤로 구급차와 자동차 경적 소리가 섞여 있었다.
"너희가 원본 찾는 걸 놈들이 알아챘어. 내 사무실 서버가 폐쇄됐고, 나한테는 계약 위반 청구서가 날아왔어."
"그걸 왜 우리한테 말하죠?"
"증언하겠다고 했잖아. 누가 물으면 내가 했던 짓부터 말해. 법적으로도 책임지겠어. 그러니 증거 원본을 파기하지 마."
소라는 통화 내용을 저장하면서 분명히 말했다.
"협조한다고 면책되는 건 아닙니다."
"알아."
그가 전화를 끊자 지하 화면에 새로운 이름이 등장했다.
[원본 발행자: 도기철]
[원본 설계자: 정태수]
[원본 삭제자: 이정민]
[목격자: 강나래]
사람마다 다른 역할이 차례로 적혔다. 그런데 맨 아래에는 새 칸이 있었다.
[최초 수익자: 기입 대기]
우빈은 서둘러 화면을 캡처했다. 이름을 아는 것과 죄를 아는 것은 같지 않았다. 그 명단이 진실이라면, 처음 서류로 이익을 얻은 사람만 비어 있었다.
분류실 깊은 곳에서 모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륜우편집중국의 컨베이어가 수만 장의 서류를 삼키며 돌았다. 지하 두 층의 불이 순서대로 꺼지고 붉은 비상등만 남았다.
[원본 검증 요청 감지]
[본원금고 보호 절차 실행]
[입장 허가: 최초 수익자 1인]
우빈의 휴대전화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정우빈 님은 이미 최초 수익자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보낸 번호는 우빈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였다.
제2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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