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우편함에서 나온 손은 너무도 멀쩡했다.
나래는 그 손을 보며 뒷걸음질쳤다. 우빈은 아이를 자신의 뒤로 옮겼다. 우편함 안쪽에서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누나, 왜 그래? 같이 가자니까."
"너 누구야?"
나래의 물음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 종이에서 검은 글자가 번졌다.
[원본 목격자의 동행인: 확인 완료]
[대리 인계인: 강나래]
"확인한 적 없어요!" 나래가 소리쳤다.
우편함 안의 손이 잠시 움찔했다. 그다음에는 누군가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을 만나려면 가족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빈은 아버지가 한 말을 기억했다. 번호를 받지 말라고 했다. 이름이 없는 사람을 대신 떠맡겠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이 빚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우편함 가까이 가지 않고 소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까 병원 통화 녹음도 있죠? 나래가 동생 목소리가 다르다고 했던 부분요."
소라는 파일을 재생했다. 녹음 속 아이는 누나라고 부른 다음 아무 장난도 하지 않았다. 지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것은 두 목소리가 같다는 사실보다, 원래 동생의 버릇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기억의 표면만 가져왔네요." 소라가 말했다. "나래가 찾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냈어요."
우빈은 우편함에 직접 물었다.
"나래에게 네가 진짜라고 말하고 싶다면, 1998년 11월 3일에 무엇을 했는지 말해 봐."
"누나를 기다렸어요."
"왜 기다렸는데?"
"돌아오기를 바랐으니까요."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우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우편함이 크게 흔들렸다. 안에 있던 손이 종이처럼 접혔다 펴졌고, 손목에서 검은 수치가 튀어나왔다.
[가족 관계 미인정]
[증명 요구에 따른 검증 비용 발생]
"질문하는 것까지 비용으로 만들지 마." 우빈이 말했다.
소라가 유리창에 비친 글자를 사진으로 남겼다. "검증 비용을 청구하려면 누가 그 서비스를 요청했는지부터 입증하세요. 우리는 새로운 계약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벽의 숫자가 잠깐 멈췄다. 서강재가 자신의 반쪽 사원증을 꺼내 말없이 보여 줬다. 내부 직원 권한이 아직 일부 남아 있었다.
[검증 서비스 신청 내역: 없음]
우편함은 더 이상 비용을 청구하지 못했다. 안쪽에서 종이 뒤집는 소리가 나더니 작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여기서 나가고 싶었어."
방금 전 가짜 동생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무척 지친 여자의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소라가 물었다.
"내 이름을 찾으면…… 내 아이가 날 알아볼까?"
우빈은 유리창 가까이 갔다. 우편함 안의 손은 사라졌고 작은 흰 카드가 놓여 있었다. 카드에는 열세 번째 수취인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 찍혔다.
[보관자: 박선희]
[보관 내용: 자녀에 대한 양육 책임]
소라는 수첩을 펼쳤다. 제2정산소에 줄을 섰던 열두 사람 가운데 이름이 같던 여성이 있었다. 아픈 아들의 치료비를 막기 위해 채무 조정을 신청했다가 서류를 받지 않고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고, 연락처도 남아 있었다.
"이 사람이 진짜라면 왜 보관층에 있죠?"
서강재가 대답했다. "소망을 받아 적으면서 그걸 분리한 겁니다. 아이를 살리고 싶다는 마음에서 책임만 떼어 내 보관한 거죠. 사람은 살아 있어도 자기 아이를 돌보려던 기억이 여기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빈의 얼굴이 굳었다. 사람을 통째로 가둘 필요도 없었다. 사람에게서 가장 중요한 약속 하나를 떼어 빚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박선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낯선 번호를 보고 경계했지만 우빈이 정산소에서 만났던 사람이라고 말하자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뒤로 아들을 보면 이상해요. 사랑하는 건 분명한데…… 뭘 해 줘야 하는지 몸이 움직이지 않아요. 저도 무서워요. 제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싶어서."
우빈은 전화기를 스피커로 돌렸다. "지금 선희 씨의 책임과 관련된 기록이 여기 있습니다. 직접 말씀하신 게 맞는지 확인해 주실 수 있겠어요?"
소라가 옆에서 말했다. "대답 안 하셔도 됩니다. 어떤 서류에도 새로 서명하지 마시고요."
통화 너머로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어린아이가 말을 걸었고, 박선희가 대답했다. 아이는 약을 먹었는지부터 묻는 어머니를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귀찮음은 두 사람의 하루를 지탱해 온 평범한 습관이었다.
우빈은 잔뜩 긴장했던 어깨를 조금 내렸다. 자신들은 금고를 멈추러 왔지만, 누군가에게는 약을 먹었느냐고 물을 수 있는 하루를 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었다.
서강재는 통화 기록에 '본인 자발 진술, 서명 없음'이라고 적었다. 서류를 적는 그의 손놀림이 조금 느려졌다. 예전의 그는 이 정도 진술을 형식 미비라며 지웠을 것이다. 오늘은 지우지 않았다.
박선희는 한참 말이 없었다. 이윽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아들은 알레르기가 심해요. 병원 갈 때마다 약 봉투에 시간 써 놓고, 내가 깨울 때마다 애가 꼭 한마디 했어요. '엄마, 나 아직 안 먹었어.' 제가 자꾸 잊을까 봐요."
열세 번째 우편함에서 작은 종이 봉투 하나가 떨어졌다. 겉면에는 시간이 여러 개 적혀 있었다. 우빈은 사진을 찍고 문재복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우편물이 실제로 여기 들어온 적 있습니까?"
"없었습니다. 내가 보는 건 매번 빈 봉투였지. 그 안에 누가 어떤 말을 넣었는지는 몰랐습니다."
한편 전화기 너머 박선희가 울기 시작했다.
"아들이 방금 말했어요. 오늘 약 먹었냐고 제가 물어보니까, 옛날처럼 대답해 줬어요. 제가 그 말을 듣고 왜 이렇게 울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소라가 상황을 기록했다. 발행 서류는 지하의 카드, 부담의 실제 관계는 박선희와 아들의 전화, 목격은 문재복이 본 빈 봉투의 유통과 일행이 확인한 카드의 변화. 세 기록이 완벽히 한 사람의 피해를 입증하는지는 더 검토해야 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임을 새로운 사람에게 떠넘기지 않고, 피해자가 겪은 변화가 기록될 길이 열렸다.
우편함 위 숫자가 바뀌었다.
[보관 책임: 1건 원본 검증]
[이전 중지]
우빈은 거의 웃을 뻔했다. 한 건뿐이었지만 누군가의 빚을 타인에게 넘기지 않고 멈춘 첫 순간이었다.
"하나씩 하면 되겠네요."
서강재는 기뻐하지 못했다. 검은 천장에 새 숫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검증 완료 건수: 1]
[잔여 대상: 14,200]
[정산까지: 65:08:16]
숫자를 본 소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 명을 구하는 데도 긴 대화와 오래된 증거가 필요했다. 남은 사람들 모두를 위해 같은 일을 할 시간은 없었다.
우빈이 물었다.
"원본 검증을 한 건씩 말고, 규칙 전체에 적용할 방법 없습니까?"
서강재는 위쪽 유리창에 쓰인 세 글자를 가리켰다.
'대표 원본.'
"처음 규칙이 바뀌었던 서류를 찾으면 됩니다. 그 서류가 불법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입증하면, 그 규칙에 따라 발행된 기록 전체의 집행을 정지시킬 근거가 생길 수 있어요."
"그 서류는 어디 있죠?"
그때 문재복이 경비용 수첩을 펼쳤다. 1998년 11월 3일자 기록이 있었다. 글씨가 번져 읽기 어려웠지만 주소와 수령인은 남아 있었다.
'대표 원본 반입. 지하 보관실. 인계자 정태수.'
우빈은 아버지의 이름을 한참 바라봤다.
아버지가 금고를 망가뜨리려 했는지, 아니면 금고를 완성시키려 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최초 서류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이제 알았다.
그가 창가의 비상문으로 걸어가려는 순간 우편함 속에서 다시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오른손은 그날 다친 게 아니야. 처음부터 없었어."
나래가 고개를 들었다. 그건 그녀가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제2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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