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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22화
PAYLUA ORIGINAL · 제22화

22화. 이름보다 먼저 온 편지

빚을 먹는 금고 · 3,564자

오프라인 책장
이명숙의 병실에는 꽃병이 하나 있었다. 정우빈이 그날 새벽 사다 놓은 국화였다. 어머니는 생전 꽃을 오래 두지 않았다. 관리할 여유가 없다는 이유였다. 우빈이 병실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꽃병의 물을 갈고 있었다. 창문에 비친 얼굴이 피곤해 보였지만 아들 이름만은 정확하게 불렀다. "우빈아. 밥은 먹었니?" 그 한마디에 우빈은 숨이 놓였다. 그러나 병실 침대 아래에는 새 우편봉투가 놓여 있었다. 수취인 이명숙. 발송인 미상. 수취 확인란에는 작은 붉은 원이 그려져 있었다. 우빈은 봉투를 집어 들지 않았다. "엄마, 누가 이걸 줬어?" "아침에 직원이 두고 갔나 봐. 이상하지. 병원에서 우편은 원무과가 나눠 주는데." 그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간호사는 우편물을 배달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CCTV에는 봉투가 생겨난 순간만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물체가 화면 안에 들어오는 장면도 없이, 침대 다리 옆 빈 바닥에 갑자기 흰 사각형이 나타났다. 병실 복도에서는 환자 보호자들이 병원비 수납 창구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누군가 주머니에서 몇 번이나 계산기를 꺼냈다 넣었고, 한 노인은 가족과 통화하며 치료를 하루만 미룰 수 있느냐고 물었다. 우빈은 그들이 금고의 광고를 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은행에서 빌릴 수 없는 돈을 당장 마련해 주겠다는 약속은 절박한 사람에게 평범한 광고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담요를 무릎까지 끌어올렸다. "난 그때 네 아버지 말이 맞는지 몰랐다. 지금도 다는 몰라. 그래도 누군가 우리 이름을 적어도 되느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한 번은 우리한테 물어야지." 우빈은 고개를 숙였다. 금고가 뺏어 간 것은 돈보다 먼저 질문받을 권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라가 병실 밖에서 영상의 원본 파일을 복사했다. "기계가 없는 사람을 만들 수는 있어도, 보통은 종이부터 보내네요." 우빈은 어머니에게 봉투를 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등을 눌렀다. "내가 또 널 잊을까 봐 그러니?" 우빈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네. 그런데 겁난다고 모른 척하면 더 위험해져요. 내가 알아볼게요." 이명숙은 잠시 망설이다 침대 옆 서랍에서 작은 통장을 꺼냈다. 우빈의 아버지 정태수가 마지막으로 집에 가져왔던 것이었다. 거래 내역은 몇 장 없었고, 대부분 오래전 해지된 계좌의 입출금 기록이었다. "네 아버지가 그러더라. 돈을 갚았다는 증거만큼 중요한 게 누구 돈인지 아는 거래. 그땐 무슨 소린지 몰랐지." 통장 사이에 접힌 영수증 한 장이 있었다. 1998년 삼목 철공소의 부품 납품 영수증이었다. 도기철이 운영하던 회사 이름 옆에 정태수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금액은 0원. 그러나 뒷면에 연필로 적힌 것은 돈이 아니었다. '강나래. 무사 귀가 확인. 목격자: 이정민.' 소라는 그 글씨를 두 번 읽었다. "엄마 필체예요. 제가 어릴 때까지 쓰던 장보기 수첩과 같아요." "귀가 확인이면 나래가 공방에서 나갔다는 뜻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어요. 아니면 누가 그렇게 기록했을 수도 있고요." 우빈은 종이를 빛에 비췄다. 아래쪽에 작은 압인 자국이 있었다. 가느다란 직선이 세 개 겹친 표식. 도기철 서랍의 배송 노선도에도 있던 문양이었다. 그때 어머니가 침대 난간을 잡았다. "잠깐. 그날 비가 왔는데…… 아이가 신발을 한 짝만 신고 있었어." 소라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가 나래를 보셨어요?" "그 아이가 누군지는 몰랐지. 네 아버지가 새벽에 데리고 왔었어. 아이가 자꾸 '내 동생이 안에 있다'고 했어. 그런데 사진엔 그 애 혼자였지." 병실의 공기가 한순간 차가워졌다. 나래는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서강재가 간호사에게 불필요한 소란을 만들지 않도록 곁을 지키고 있었다. 우빈은 문을 살짝 열고 아이를 바라봤다. 나래는 병원 창문에 비친 자신의 발을 세고 있었다. 두 발 모두 있었다. 하지만 이명숙의 기억 속 아이는 신발이 한 짝뿐이었다. "기억이 일치하지 않네요." 소라가 말했다. "그러니 더 확인해야겠죠." 우빈은 어머니를 안심시키려 웃으려다가 실패했다. 어머니는 되레 웃었다. "우빈아, 나 걱정하는 거 안다. 그래도 네가 날 지키려고 남 대신 책임지는 짓은 하지 마라. 너만 희생하면 된다는 말은 네 아버지가 가장 싫어했어." 병실 문을 나섰을 때 우빈은 휴대전화에 도착한 시계 알림을 확인했다. [정산까지 69:42:11] 소라는 영수증 사진을 조사했다. 종이는 진짜 오래된 것이었다. 인쇄지의 섬유가 상했고, 같은 제조 공정을 쓴 1990년대 납품 용지를 나중에 구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적어 두었다. 증거 하나로 시대를 단정할 수 없었다. "세 가지가 필요해요." 그녀가 말했다. "서류가 발행됐다는 증거, 실제로 누가 책임을 졌는지의 증거, 그 장면을 본 사람의 증언. 회사가 셋 중 하나를 조작하면 나머지 둘로 대조할 수 있게." 서강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00번은 그 확인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보관자가 마음대로 채권자를 새로 쓰지 못하게 막는 삼중 기록. 그런데 상업용으로 바꾸면서 동의 버튼 하나로 나머지를 대신하도록 했죠." "그럼 우리가 원본을 되찾으면요?" "새 계약의 발행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잘못 넘어간 책임까지 돌리려면 당사자별 기록이 필요하겠지만." 그날 오전 소라는 이명숙의 영수증에서 확인한 이름을 바탕으로 수기 기록을 조사했다. 강나래라는 이름은 오래전 한 지역신문의 실종 기사에 있었다. 그런데 실종자 목록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강나래의 이름 위에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어린이 한 명이 더 있었다. '11월 3일, 구륜동 아동 두 명 귀가하지 않아.' 소라가 신문을 확대했다. 다음 날 정정보도에는 '실종 신고 한 건 착오'라고만 적혔다. 어느 아이가 집에 돌아왔는지는 쓰여 있지 않았다. "나래에게 동생이 있었다면, 그 애를 찾는 게 먼저겠어요." 우빈은 지금까지 나래를 금고가 남긴 목격 기록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기록이 복제됐든 오래 머물렀든, 누군가의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진짜처럼 느껴졌다. 그는 복도로 나가 아이 앞에 앉았다. "나래야. 네 동생 이름 기억해?" 나래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동생이 있었어요?" "그럴 가능성이 있어. 기억 안 나도 괜찮아." "아니요. 기억해 내야 해요. 모두 제가 봤다고 하잖아요. 근데 뭘 봤는지 저도 모르잖아요." 서강재가 작은 종이컵에 미지근한 물을 받아 건넸다. 아이는 컵을 들고 한참 들여다봤다. 물 표면에 이상한 글자가 비쳤다. [동행인 확인: 강나래 외 1인] [동행인 귀가 결과: 미수령] 우빈이 컵을 기울이자 글씨가 사라졌다. 나래는 물을 쏟지 않으려 컵을 더 꽉 쥐었다. "미수령이 뭐예요?" "아직 데리러 온 사람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어." 그 순간 복도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흘렀다. "강나래 보호자분, 원무과로 와 주십시오." 병원에서 그 아이의 신원을 접수한 사람은 없었다. 소라가 간호사 데스크를 향해 달려갔을 때, 안내방송은 다시 울렸다. "강나래 보호자분, 미수령 아동 한 명을 인계받으십시오. 수령 지연 시 보증인 이명숙 님께 이관됩니다." 우빈은 고개를 돌렸다. 병실 문틈으로 검은 봉투 한 장이 천천히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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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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