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에서 나래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정작 나래는 우빈의 오른편에 서 있었다.
아이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도기철의 사무실 천장에 붙은 형광등이 깜빡일 때마다 아이의 그림자가 책상 쪽으로 길어졌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이의 목소리가 같은 문장을 한 번 더 반복했다.
"그 사람은 제 이름도 아직 안 돌려줬어요."
우빈이 스피커를 끄려 하자 서강재가 손을 들었다.
"잠깐. 발신 번호가 아니라 통화 기록을 보세요."
화면에는 [정태수]라는 이름만 있었고 번호는 비어 있었다. 통화 시간은 00:00으로 표시됐다. 우빈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조작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전화기 안쪽에서 기침이 들렸다. 아버지는 오래전 쇳가루를 들이마신 뒤부터 말을 잇기 전에 꼭 두 번 기침했다. 정태수만의 버릇이었다.
"아버지. 지금 어디 계세요?"
"네가 망치를 처음 들었던 곳을 생각해라. 금고는 쇠로만 만든 게 아니다. 문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만들어졌어."
"다른 이야기는 그만하세요. 아버지부터—"
"우빈아, 번호를 받지 마라. 너희 중 누가 대신 책임지겠다고 하면 문이 열릴 거야. 그러면 그 사람이 다시 갇힌다."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소라가 곧장 다른 휴대전화로 우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상적으로 벨이 울렸다. 서로의 화면에는 번호가 표시됐다. 방금 일어난 일과 구별되는 평범함 때문에 우빈은 오히려 손이 떨렸다.
"이 통화가 정말 아버지였는지 확인해야 해요."
"확인할 방법이 있어요." 소라가 말했다. "말보다 날짜가 남는 기록이요."
소라는 통화가 끝난 휴대전화를 우빈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신이 녹음한 소리를 다시 들려주었다. 첫 문장 뒤에 아주 낮은 쇠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있었다. 아버지 정태수가 쓰던 공방 망치는 날카로운 종소리가 났지만, 녹음 속 소리는 둔탁했다. 우빈은 두 가지 소리가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소리는 아버지인데 배경은 달라요."
"아버지일 수도 있고, 아버지의 기록일 수도 있겠죠." 소라가 말했다. "지금은 어느 쪽도 확정할 수 없어요."
우빈은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살아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았지만, 희망을 미끼로 삼는 금고에게 다음 선택을 내주고 싶지도 않았다.
도기철은 몇 분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니터의 숫자가 계속 줄고 있었다.
[전체 대상자 정산 예고: 71:56:12]
"그 시계가 끝나면 어떻게 됩니까?" 우빈이 물었다.
"각 계약서의 빈칸에 누군가의 이름이 들어가겠지. 남은 보관 채무는 그 사람들한테 한꺼번에 돌아가고."
"누구 이름이요?"
도기철은 대답하지 못했다. 모른다는 사람의 표정은 거짓말을 할 때보다 비참해 보였다.
나래는 벽에 나타난 숫자를 보고 있었다. 아이는 낡은 번호표를 펴서 숫자 아래 대 보았다. 종이 위에는 이제 '강나래' 세 글자가 또렷했다. 그 아래 한 줄이 새로 생겼다.
[목격 기록 원본 위치: 본원금고 보관층]
"저 안에 제 이름이 있어요." 나래가 말했다. "정확히는, 제 이름을 불렀던 사람들이요."
우빈은 그 말의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이름은 종이에 적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까지 대체할 수는 없었다. 그때 나래는 아이처럼 보이면서도 오래된 녹음기처럼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제가 기억하는 마지막 건 비였어요. 아주 많이 왔어요. 누군가 공방 문을 두드렸고, 아저씨들이 책상을 옮겼어요. 그다음은 같은 밤이 계속돼요."
"네가 정말 그날의 나래라면," 소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네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어?"
아이는 소라를 바라봤다.
"저는 여기 있어요. 그런데 저 안에도 있어요."
책상 위 전화기가 제멋대로 진동했다. 이번에는 통화가 아니라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화면에는 작은 교실이 있었다. 의자마다 사람이 앉아 있었지만 얼굴 대신 사각형의 흰 종이가 붙어 있었다. 가장 앞자리에는 열두 살가량의 소녀가 서 있었다. 나래와 같은 얼굴이었다.
[보관층 3열 7번 / 원본 목격자 대기]
우빈이 화면을 확대했다. 교실 벽의 시계는 멈춰 있었다. 그 아래 작은 게시판에 적힌 날짜가 보였다.
1998년 11월 3일.
"사진이면 조작할 수 있죠." 소라가 말했다.
"맞아요. 그러니 이건 위치를 가리키는 단서로만 쓰죠." 우빈이 답했다.
서강재는 잠시 우빈을 쳐다봤다. 처음 만났을 때 우빈은 금고가 보여 주는 글자를 곧바로 믿었다. 이제는 친아버지의 목소리조차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있었다.
도기철이 책상 안쪽의 금속판을 눌렀다. 숨겨진 서랍이 열리며 오래된 우편물 묶음이 나왔다. 흙냄새와 기름 냄새가 섞인 종이였다.
"본원금고의 주소를 찾아오라고? 주소는 처음부터 있었어. 우리는 모두 다른 곳을 보도록 훈련됐을 뿐이지."
가장 위 봉투에는 발신인이 없었다. 수취인 칸만 빽빽했다. 열두 명의 이름 뒤에 마지막 열세 번째 칸이 비어 있었다.
"이건 초대장이 아니라 배송 명부군요." 소라가 말했다.
"무엇을 배송합니까?"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배송했지." 도기철이 답했다. "본원은 금고를 파는 곳이 아니야. 옮긴 책임이 어디에 도착했는지 관리하는 곳이야."
우빈은 열세 번째 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이지 않는 잉크가 천천히 번졌다.
[수취 보류: 정우빈]
그는 얼른 손을 뗐다. 서류는 여전히 미완성이었다. 불안한 것은 이름보다 아래쪽에 적힌 배송 조건이었다.
[수취인 부재 시 동거 가족에게 자동 이전]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병원에서 겨우 자신을 다시 알아본 사람이었다. 그런데 시스템은 그 회복마저 새로운 위험으로 바꾸고 있었다.
우빈은 봉투를 사진으로 남기고 금고에서 받은 망치로 서랍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속이 빈 소리가 났다. 이중 바닥을 들어 올리자 누렇게 변색된 배송 노선도가 나왔다. 가장 굵은 선이 도심 바깥의 폐쇄된 우편집중국으로 이어졌다.
소라는 노선도와 현재 지도를 겹쳤다. 철거 예정지로 표시된 건물 하나가 맞아떨어졌다.
"구륜우편집중국. 지금은 아무도 편지를 받지 않는 곳이에요."
나래가 종이 위 건물 그림을 보고 중얼거렸다.
"거기선 아직도 제 이름을 부르고 있어요."
서강재의 사원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뒷면에 붉은 숫자가 찍혔다.
[회수 경로 재지정]
[목표: 강나래의 원본]
[운송 담당: 서강재]
그는 곧장 사원증을 뒤집어 책상에 놓았다. 우빈이 물었다.
"당신에게 시킨 겁니까?"
"그렇게 보입니다."
"할 생각은요?"
서강재는 사원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도 선택권이 있다는 걸 보여 줘야겠군요."
그가 사원증을 가위로 자르자 천장에서 검은 봉투 수십 장이 떨어졌다. 하나같이 주소 없는 반송 우편이었다. 봉투마다 단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수취를 거부한 책임은 발송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우빈은 그 문장을 읽으며 깨달았다. 누군가 거부하기만 해서는 끝나지 않는 판이었다. 처음부터 책임을 만들어 낸 발행자를 밝혀야 했다.
문밖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 열두 층 복도 전광판에 새로운 안내가 떴다.
[본원금고 배송 개시]
[첫 번째 반송 대상: 이명숙]
어머니 이름이었다.
제21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