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20화
PAYLUA ORIGINAL · 제20화

20화. 첫 번째 거짓말

빚을 먹는 금고 · 4,520자

오프라인 책장
도기철이 책상 서랍에서 낡은 사진을 꺼냈다.소라는 녹음기의 전원을 확인했다. 12층 사무실의 창문은 두껍고, 복도에는 감시 카메라가 여럿 있었다.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디론가 새어 나갈 것 같았다. "이 자리에서 하시는 말은 녹음하겠습니다. 기록이 바뀔 수 있으니까 하나만 남겨 둘 수 없어요." "그러게. 이 회사엔 녹음도 충분하지 않지." 도기철은 곧장 인정했다. "그래서 제가 직접 말하는 것 외에 원래 남겼던 종이도 보여 줄 겁니다. 옛날 장부에는 아직 수기로 쓴 날짜가 남아 있어요. 다만 그 장부를 읽는 사람의 이름이 바뀌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우빈은 의자를 당기지 않았다. 언제라도 일어설 수 있게 서 있었다. 상대가 늙고 약해 보인다고 해서 경계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제가 원하는 건 변명이 아닙니다. 왜 우리 아버지까지 이 일을 하게 됐는지, 엄마가 왜 저를 잊을 뻔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약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멈춰야 합니다." "그렇게 간단하면 좋겠군." 도기철은 창문 밖 천막들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한 서류를 바로잡으려던 기계였어. 이제는 사람들이 불안해할수록 새 서류가 생겨. 누군가 미래의 위험을 없애 달라고 부탁하면 그 부탁이 새로운 채무로 바뀌는 거지. 나도 이만큼 커질 줄은 몰랐어. 그 말이 죄를 줄여 주진 않겠지만." 소라가 그를 노려봤다. "줄여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해 주세요. 기억하는 걸 본 것처럼 꾸미지도 마시고요." 도기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가장 어려운 요구인 것 같았다. 1998년 11월의 삼목 철공소. 젊은 정태수와 이정민, 도기철이 함께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보였다. 나래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우빈은 사진과 아이를 번갈아 봤다. "그때도 열두 살이었는데 지금도……" "사람이 그 상태로 남아 있을 리 없지." 도기철이 말했다. 나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에 든 번호표를 조금 더 구겼을 뿐이었다. "그럼 저 아이는 뭡니까?" "한 사람의 기억이야. 정확히는 그날 있었던 일을 증명할 수 있는 마지막 기록." 소라가 앞으로 나섰다. "제 어머니가 기록을 삭제한 이유부터 설명하세요." 도기철은 사진 뒷면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나래, 관찰 기록. 실험과 무관한 방문자'라고 적혀 있었다. "우린 채권을 정정하는 기계를 만들었어. 잘못 씌워진 책임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장치였지. 그런데 세 번째 실험에서 처음으로 채권자 이름이 없는 서류가 들어왔어." "이름이 없었다면서요?" 우빈이 물었다. "그땐 우리도 그렇게 믿었어. 하지만 아니었어. 누군가 채권자 칸을 없애 버렸던 거야. 원래 계약 당사자를 확인하지 못하는 동안 채무를 임시로 맡아 줄 존재를 만든 게 00번 금고였지." 그는 손끝으로 사진 속 어린 나래를 가리켰다. "그날 이 아이가 모든 걸 봤다. 우리가 누군가를 보호하겠다고 만든 임시 보관함이, 책임을 떠넘기는 기계로 바뀌는 순간을." 나래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제가 책상 밑에 있는 걸 알았어요." 도기철은 시선을 피했다. "알았지."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내가 비겁했으니까." 그의 대답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복잡한 설명보다 짧고 분명한 말이 더 무거웠다. 서강재가 물었다. "그럼 왜 아이를 금고 속에 남겨 놨습니까?" "내가 남긴 게 아니야. 이정민이 한 일이었어." 소라는 그를 노려봤다. "엄마가 아이를 가둔 거라고 말하는 겁니까?" "아니. 반대로. 누군가 아이를 없애려고 했어. 그 애가 본 걸 인정하면 기계는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이정민은 아이의 목격을 기록 밖으로 빼냈어. 지워 버린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실제로는 00번 금고 안쪽에 남겨 둔 거지." 우빈은 회사 화면의 로그를 떠올렸다. [삭제 실행자: 이정민] 삭제라는 한 단어만 읽고 죄를 판단할 수 없었다. 무엇을 지웠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살리려 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이름을 다시 되찾을 수는 없습니까?" 소라가 물었다. "아이의 실명은 존재해. 하지만 그것을 보려면 00번의 내부 목격 기록을 열어야 해." "왜 지금까지 숨겼죠?" 도기철은 침묵했다.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거칠었다. "내가 돈을 벌었거든. 채권자 칸이 빈 계약을 상품으로 팔았어. 금고에 넣으면 빚이 사라진다는 말은 누구든 듣고 싶어 했지. 사람들은 차마 누구에게 책임을 떠넘기는지 묻지 않았고, 나는 그 침묵에 가격을 붙였어." 우빈은 망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도기철을 당장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분노로 사람 하나를 쓰러뜨려도 장부는 멈추지 않는다. 그가 남긴 증거를 받아내는 것이 먼저였다. "지금 그걸 인정하는 이유는 뭡니까?" "이 회사도 나를 버리기 시작했어. 수수료를 벌어다 준 사람은 더는 필요 없대. 자기들끼리 빈칸을 늘리고, 사람의 관계와 목숨을 담보로 쓰고 있어." 소라가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이제 와서 도와 달라는 거군요." "도와달라곤 하지 않겠어. 내가 아는 걸 기록해. 나중에 나한테도 책임을 물어." 서강재가 녹음기를 켰다. 도기철은 자기 이름과 과거에 한 일을 직접 말했다. 외부인에게 들려주는 첫 자백이었다. 그리고 기록이 멈추지 않도록 자기 손으로 서명했다. 그 순간 사무실의 전광판이 붉어졌다. [원본 발행 책임자 도기철] [허위 발행 인정: 1건] [기초 자료 정정 요청]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바닥 아래에서 수천 장의 종이가 한꺼번에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우빈은 창문 밖을 내다봤다. 광장에서 무료 상담을 받던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고 있었다. 손에 쥔 계약서의 검은 글씨가 흐려졌다. "멈췄나요?" 나래가 물었다. "하나만. 첫 번째 거짓말 하나를 바로잡은 거야." 소라가 화면을 확인했다. 허위 발행 인정은 '1건'뿐이었다. 다른 14,200건은 여전히 보류 상태였다. 공장 롤러도 보관 한도가 차면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들은 기계가 멈추는 조건을 알아냈지만, 그 조건을 모든 거래에 적용할 증거는 없었다. 한 사람의 자백만으로 원래 채권자가 누구인지 다 밝혀지는 것도 아니었다. 도기철이 낡은 열쇠를 내밀었다. "본사는 여기지만 00의 주인은 여기에 없어. 그건 사람 손에 있는 물건도 아니고." "어디 있죠?" 우빈이 물었다. "첫 번째 서류가 발행된 장소. 최초 채권자 칸을 도려낸 사람만 알고 있어." "그 사람이 누구냐고요!" 도기철은 대답 대신 나래의 번호표를 바라봤다. 아이의 손안에 있던 종이가 저절로 펴졌다. 처음으로 번호표 뒷면이 보였다. '최초 목격자: 강나래.' 그 아래에는 더 작은 문장이 있었다. '최초 삭제 실행자: 이정민.' 소라가 숨을 멈췄다. 조금 전 도기철은 어머니가 증거를 보호하려고 기록을 지웠다고 했다. 하지만 번호표에는 다른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최초 삭제: 1998.11.03 03:14] [증거 보존 등록: 1998.11.03 03:15] 딱 일 분 차이였다. "엄마가 먼저 지웠고, 그다음에 살린 거예요?" 소라가 중얼거렸다. 서강재는 그 시간 차이가 뜻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첫 번째 삭제가 강제로 집행됐고, 이정민 씨가 바로 다음 분에 증거를 복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초 실행자는 다른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럼 왜 같은 이름이 찍혔죠?" 질문에 답한 사람은 나래였다. "누군가 엄마 이름을 빌렸어요."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비어 있던 발목의 숫자가 새로운 문장으로 바뀌고 있었다. [원본 기억 일부 복구] "그 사람이 그랬어요. 사람의 이름은 빌려 쓰면 된다고. 계약서를 바꿀 때마다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다고." "누구?" 나래의 입술이 떨렸다. "그 사람이 제게 자기 이름을 알려 줬어요."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회사 모든 모니터에 한 문장이 떴다. [최초 채권자의 실명 열람 권한 승인] 우빈은 화면을 향해 다가갔다. 검은 글자가 타이핑되기 시작했다. 한 글자씩, 마치 누군가 망설이며 자기 이름을 고르는 것처럼. [채권자 유형: 인간 아님] [식별 명칭: 미결] 도기철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아직도 살아 있는 건가……" 창문에 비친 도심 건물 위로 수많은 검은 숫자가 떠올랐다. 그 숫자들이 한 방향으로 모이고 있었다. 제2정산소도, 삼목 철공소도 아닌 도심 외곽의 낡은 건물이었다. [미결 / 본원금고 가동] [전체 대상자 정산 예고: 72:00:00] 우빈은 화면에 나타난 '미결'이라는 이름을 오래 바라봤다. 사람 이름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의 이름을 훔쳐 자기 몸을 만든 무언가였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아버지 정태수였다. 분명 금고 안에 갇혀 있던 사람의 이름이었다. "우빈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금고를 부수러 가면 안 된다. 우리가 먼저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전화 너머에서 어린 나래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아저씨. 그 사람은 제 이름도 아직 안 돌려줬어요."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20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2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