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9화
PAYLUA ORIGINAL · 제19화

19화. 서명하지 않은 회사

빚을 먹는 금고 · 3,502자

오프라인 책장
미상채권관리 주식회사. 간판은 도심 사무실 건물의 12층에 붙어 있었다. 인터넷 검색 결과에는 금융 상담과 채권 관련 전산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라고 적혀 있었다. 대표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사업장 주소는 지난 몇 년 동안 세 번 바뀌어 있었다. "회사 자체는 실재하는 것 같아요." 소라가 말했다. 그녀는 철공소에서 확보한 발행 책임자 코드를 다시 펼쳤다. [DK-00] "DK는 도기철의 머리글자일 수 있어요. 하지만 기계를 움직이는 법인의 현재 이름은 다른 쪽이죠. 그 사이에 뭔가 일어났어요." 서강재는 자신의 옛 사원증을 꺼냈다. 검은 넥타이가 아직 목에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건물 로비 출입구에서 사원증을 대자 초록 불이 켜졌다. [서강재 / 유효 사원] "퇴사 처리가 안 됐다더니 정말이군요." 그는 웃지 않았다. 오래전 스스로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곳이 자신을 한 번도 내보낸 적 없었다는 뜻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마주친 복도에는 화분도, 안내판도 없었다.엘리베이터가 12층에 닿기 직전, 서강재의 사원증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잔여 복무 시간: 무기한] [퇴사 승인권자: 미등록] "이게 나를 붙잡은 이유군요." 서강재는 명찰을 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퇴사 승인권자가 없으니 누구도 퇴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자기 이름을 팔아 들어온 직원들이 영원히 빚을 갚도록 만든 거예요." 소라가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당신은 나왔잖아요." "나왔다고 생각했죠. 지금 보니 몸만 밖으로 나온 겁니다. 이 이름이 여기에 걸려 있는 동안은 저 사람들이 언제든 내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어요." "그럼 직접 증명하면 되지 않아요? 회사를 위해 일하지 않겠다고." 서강재는 손등의 흰 자국을 만졌다. "그 말을 했던 적 있습니다. 다음 날 동생 기록이 한 줄 지워졌죠. 내가 자유로워지는 대가를 다은이에게 청구한 겁니다." 우빈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우리는 당신 이름으로도 증거를 모읍시다. 다은 씨에게 빚을 넘기지 않고 퇴사할 방법이 있는지. 그런 방법이 아예 없다면 애초에 그 계약이 잘못된 거고요." 서강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에게 책임을 지우는 일을 거절할 수 있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지금까지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복도 끝에 사무실 간판이 걸려 있었다. 미상채권관리. '미상'이라는 두 글자는 세련된 기업 로고처럼 디자인돼 있었다. 우빈은 그 글자를 보며 기분이 나빴다. 누구인지 모른다는 뜻의 말을 당당하게 회사 이름으로 걸고 있으면서, 직원의 이름은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 곳이었다. 대신 벽마다 나무 액자에 청구서가 걸려 있었다. 사람의 이름은 검은 선으로 가려져 있었고, 금액은 모두 0원이었다. "여긴 왜 전부 0원이죠?" 우빈이 물었다. "회사가 자랑하는 실적입니다. 고객의 빚을 0원으로 만든 건수." "그다음은요?" "다음 칸은 아무도 보지 못하게 했죠." 사무실 안에는 책상 열두 개가 놓여 있었다.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키보드만 스스로 움직였고, 프린터에서는 매분 새 안내문이 나왔다. 우빈은 한 장을 집어 들려다 멈췄다. 손을 대면 다시 자신의 이름이 올라갈지 몰랐다. 소라는 보이는 화면을 사진으로 남겼다. 장부를 뒤집지 않고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었다. [오늘 처리: 1,704건] [채무 상환: 0건] [책임 이전: 1,704건] "이 회사는 돈을 갚은 적이 없어요." 그녀의 말에 서강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액을 없애지 않고 책임만 넘겼죠. 고객이 보는 화면만 0으로 만들었습니다." 나래는 창가에 서서 창문에 손바닥을 댔다. 유리에는 도심이 비쳤지만 아이는 그 반대쪽을 보고 있었다. "여기서는 제 그림자가 다시 없어져요." 정말로 바닥에 나래의 그림자가 없었다. 우빈은 자기 발밑을 확인했다. 그의 그림자는 이곳에 와서 다시 생겼다. 아이가 잃은 것을 우빈이 되찾은 셈이었다. "이게 무슨 교환이죠?" 서강재는 회계 프로그램처럼 생긴 화면을 열었다. 회사 자료 중 일부가 관리자의 권한 없이 조회됐다. 장부의 기술은 완전히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전산망과 사람들이 서명한 계약을 이용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이상한 기술이 뒤섞여 있었다. 화면 한가운데 '잔여 책임 집계'라는 항목이 보였다. [거짓 계약으로 발생한 책임: 14,201건] [수수료 수익: 지정 수취인 없음] [기록 통제 권한: 최초 발행자] "수수료를 받은 사람이 없다니, 이상하네요." 소라가 말했다. 우빈은 화면 아래 작은 버튼을 발견했다. '원본 발행자 확인'. 버튼 위에 커서를 올리자 안내문이 떴다. '본 조회는 채무의 인수와 관계없으며, 허위 청구를 발견한 사람이 원본 발행자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정태수가 남긴 원래 조항과 닮은 문장이었다. 서강재가 화면을 확대했다. "잠깐. 저 버튼은 예전 코드에서만 존재하던 겁니다. 숨겨 둔 게 아니라 누군가 되살렸어요." "누군가요?" "권한을 가진 내부 직원. 혹은 아직 시스템에 남은 원본 보증인." 우빈의 가슴이 뛰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었다. 소라는 버튼을 누르기 전에 각자 동의를 확인했다. 누군가의 이름이 공개될 수 있으니 그 이름을 대체 채무자로 삼지 않을 것, 기록을 숨기지 않을 것.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래도 작은 손을 들었다. 화면이 한참 동안 검었다. 그 위로 글자가 한 줄씩 나타났다. [원본 발행 조직: 미상채권관리] [원본 발행 책임자: 도기철] [최초 수익자: 데이터 없음] [수익자 삭제 이력: 1998.11.03 03:14] [삭제 실행자: 이정민] "우리 엄마가 삭제했다고요?" 소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서강재가 기계의 로그를 확인했다. "삭제는 맞습니다. 하지만 왜 했는지는 안 나와요." 소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까지 어머니는 무고한 피해자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스템은 어머니가 중요한 기록 하나를 직접 지웠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그 사실이 거짓인지도, 어떤 절박한 이유가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우빈은 섣불리 위로하지 않았다. 누군가 거짓말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려면, 믿고 싶은 사람의 기록도 살펴야 했다. 사무실 끝 문에서 자물쇠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문은 안쪽에서 열렸다. 흰 머리의 남자가 나왔다. 소매를 걷은 팔에는 낡은 화상 흉터가 있었다. 그는 네 사람을 놀라워하지 않았다. "늦었군." 도기철이었다. 소라가 사진에서 보았던 얼굴보다 훨씬 늙었지만 눈매가 같았다. 우빈이 망치를 들자 도기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걸 아직 갖고 있나. 태수가 좋은 물건 하나는 만들었지." "당신이 금고를 만들어서 우리 가족을 이렇게 했습니까?" "금고를 상업용으로 만든 건 나야. 하지만 최초 채권자를 지운 건 내가 아니지." "그럼 누구인데요?" 도기철이 나래를 바라봤다. 아이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돈이 필요한 사람은 없었어. 이름이 필요한 쪽은 저기 있었지." 그는 나래를 가리켰다. "그 아이는 우리가 만든 기계의 오류가 아니야. 우리 기계가 잘못된 걸 알려 주기 위해 남긴 마지막 증거야."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19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19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