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되기 전, 연화빌라 지하에는 세 사람만 내려갔다.
정우빈과 김소라, 박현정이었다. 건물 관리자는 비상 출입문 앞에서 안전 절차를 확인했고, 외부 조사 담당자는 기존 금고의 상태와 수집된 계약서를 대조할 준비를 했다. 정태수와 이명숙은 위층에서 기다렸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우빈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지 않겠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검은 금고는 평소보다 작아 보였다. 처음 이 물건을 만났을 때 우빈은 문이 이렇게 두꺼웠는지 몰랐다. 허름한 창고의 벽 뒤에 놓인 사각형 상자가 인생 전체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을 뿐이었다.
문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최초 사용자의 정산 요청]
[남은 채무를 지울 기회]
“없애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우빈이 말했다. “무슨 기록을 누구에게 옮겼는지 확인하러 왔어요.”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에는 종이 한 장이 있었다. 그날 처음 넣었던 채무 계약서의 사본이었다. 도영식의 도장, 부모의 주소, 우빈의 이름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그러나 뒷면에는 수십 개의 다른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중에는 우빈이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제가 그날 본 건 앞면뿐이었어요.”
소라는 손전등을 비추었다. 뒷면의 글씨는 찢어진 사진처럼 서로 다른 시각으로 겹쳐 있었다. 현정은 금고가 만들어 낸 항목과 실제 금융기관의 원장을 혼동하지 않도록 사진마다 출처를 구분했다.
‘너의 첫 선택으로 모두가 연결됐다.’
금고의 목소리였다.
“제 행동에 책임이 없다는 말은 안 합니다.” 우빈이 답했다. “하지만 제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쓰도록 허락한 적은 없어요.”
금고에서 종이 손들이 튀어나왔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그 손끝에 매달려 있었다. 소라는 귀를 막지 않았다. 각 손의 이름 대신 숫자와 주소가 떠오르자 그녀는 그것들을 읽어 보려다 멈췄다. 지금 모든 개인정보를 복사하면 오히려 또 다른 피해가 생길 수 있었다.
“이름을 되찾으려면 이름을 전부 훔쳐야 한다는 거짓말에 속지 마요.”
현정은 이미 허가받은 검증 결과만 화면에 올렸다.
[2010년 원천 지급 완료 기록: 근거 불일치]
[J-00 자동 정정 권한: 사용 중지]
[허위 이전·수령 추정: 원천 승인 근거 없음]
[실제 지급 및 미지급 청구권: 보존]
금고의 안쪽에서 오래된 음성이 울렸다. 검은 양복의 남자, 도영식, 종이 괴물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섞여 있었다.
‘너 혼자 우리를 끝낼 수는 없다.’
“혼자가 아니니까 여기까지 왔어요.”
우빈은 황동 열쇠를 꺼냈다. 열쇠가 처음부터 이 금고를 여는 것인지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열쇠 구멍은 문 오른쪽 아래에 있었고, 그 옆에는 아주 작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검토 완료 이전, 반환을 확정하지 말 것.’
“이 열쇠를 돌리면 뭐가 되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최초 사용자의 계약이 종료된다.’
“그럼 다른 사람에게 옮겨진 채무는요?”
‘자동 이전 채널이 폐쇄된다.’
“실제로 받아야 할 돈과 피해 기록은요?”
금고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현정이 대조된 목록을 읽었다. 보존 중인 장부의 사본은 이미 별도 장소에 있었고, 미확정 기록의 열람 권한도 잠금 처리되어 있었다. 열쇠를 돌려도 그 기록이 지워지지 않는지 외부 절차를 통해 확인한 뒤에야 우빈은 손을 움직였다.
황동 열쇠가 한 번 돌아갔다.
금고 안에 있던 종이들이 격렬하게 떨렸다. 빚의 괴물들이 마지막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려 했다. 도장 손은 우빈의 어깨 위로 내려왔고 영수증의 갈비뼈는 천장까지 높아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누군가의 이름을 적을 빈 서명란이 없었다. 일괄 승계 권한도, 공용 정정 계정도 더는 그들을 움직이지 못했다.
[최초 사용자 계약: 종료]
[무동의 자동 이전 채널: 폐쇄]
[원천 증빙 불일치 기록: 별도 보존]
[확인된 채무·미지급 권리: 기존 절차 유지]
사람의 모양을 이뤘던 종이들이 천천히 풀렸다. 흩어진 종이에는 숫자만 남았다. 더 이상 누구의 이름도 붙어 있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재가 아니라 빈 영수증이었다.
우빈은 무릎을 꿇었다. 손등의 오래된 상처가 따끔거렸다. 소라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끝난 거예요?”
우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금고의 계약은요.”
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건 기록을 확인하고 사람들이 받을 걸 받게 만드는 일이죠.”
세 사람은 금고를 부수지 않았다. 담당자가 보관 절차에 따라 봉인했고, 문이 다시 함부로 열리지 않도록 접근을 통제했다. 기계가 조용해진 것과 증거가 사라진 것은 같지 않았다.
우빈이 지하 계단을 올라왔을 때, 명숙은 그의 얼굴을 보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따뜻한 수건을 건넸다. 태수는 문 앞에 서서 아들의 손을 잡았다.
“미안하다.”
“아버지가 하신 일은 기록에 남겨 주세요.” 우빈이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지 않은 일까지 떠안지는 말아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계단 위에서는 누군가 저녁 설거지를 하는 소리가 났다. 금고가 요구하지 않는 평범한 생활의 소리였다.
제19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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