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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200화
PAYLUA ORIGINAL · 제200화

200화. 갚아야 할 것과 돌려줘야 할 것

빚을 먹는 금고 · 2,935자

오프라인 책장
이듬해 봄, 정우빈은 은행에서 나온 서류를 식탁 위에 펼쳤다. 종이에는 여전히 돈이 적혀 있었다. 갚아야 할 원금과 조정된 이자, 언제부터 얼마씩 납부할 것인지에 관한 계획이었다.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영 원이 되지는 않았다. 우빈은 그 사실 때문에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의 것이 아닌 빚을 지우기 위해 또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정태수는 다시 작은 공방 일을 시작했다. 예전처럼 무리한 주문을 받지는 못했다. 납품 대금이 들어오면 그 내역을 바로 기록했고, 계약서를 확인하지 않은 채 서명하지 않았다. 때로는 장부를 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거래처 직원이 짜증을 냈다. 태수는 그때마다 차분히 말했다. “받은 건 받았다고 쓰고, 아직 못 받은 건 아직이라고 써야죠.” 이명숙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살아가면서 거창한 결심보다 지키기 어려운 것은, 매번 그렇게 확인하는 일이었다. 중앙기록관리원에서는 2010년 조작 경위에 관한 정식 조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J-00이 공용 권한이었다는 사실과 장인호의 반려 문서가 승인으로 뒤바뀐 정황은 확보됐다. 도영식과 봉산채권 회수관리실의 수수료 거래 역시 별도 절차에서 다뤄졌다. 누가 어떤 지시를 내렸고 누가 이익을 얻었는지의 최종 판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바뀐 것이 있었다. 12,408건의 보류 기록은 더 이상 자동으로 누군가의 채무가 되지 않았다. 각각의 지급 여부와 미수령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가 열렸고, 실제 보상금과 임금 청구권은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당장 돈을 돌려받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는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생겼다. 강나래는 자신에게 남겨졌던 두 개의 이름과 인계 시각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누군가 대신 결정한 보호가 어떤 사람의 채무로 바뀌었는지 따로 심사할 수 있었고, 그 과정을 위해 사생활 전체를 공개하지 않아도 됐다. 강민호와 관련된 원본 08의 증언도 동의를 받은 범위에서만 남았다. 그들은 더 이상 누가 살아 있는지, 어느 주소에 사는지부터 세상에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오해경의 잃어버린 하루 역시 같은 방식으로 복구 절차에 들어갔다. 사라진 하루를 완벽하게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누가 그날 일했는지, 누가 돈을 받지 못했는지 확인할 기회는 돌아왔다. 아무도 만회할 수 없는 시간을 돈으로 계산해 없애려 하지 않았다. M-00에게서도 짧은 통지가 도착했다. 공개를 허락한 것은 보존 규칙에 관한 증언뿐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한 편지였다. 우빈은 그 범위를 넘어가려 하지 않았다. 자신을 믿어 준 사람에게 해야 할 일은 그 사람의 비밀까지 밝히는 것이 아니었다. 김소라는 어머니 이정민의 사건 자료를 다시 받았다. 사라졌던 몇 해의 모든 행방이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생존을 입증하는 자료와 실종 당시의 조작 흔적이 구분되어 심사되고 있었다. 소라는 이번에는 성급히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돌아갈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누군가 대신 쓰기 전에 자신이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날 오후 소라는 우빈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보상금 일부가 실제로 지급됐어요. 엄마가 받아야 할 몫과 제 몫을 따로 적어 놨어요.’ 우빈은 대답했다. ‘축하해요. 그건 꼭 받은 걸로 기록해 두세요.’ 곧 답장이 왔다. ‘이제는 그래야죠. 받은 걸 받았다고 쓰는 것도 중요하니까.’ 박현정은 기록관리원에서 새로 만든 심사 안내문을 보내 왔다. 안내문 첫 문장은 길지도 어려운 말도 아니었다. ‘확인되지 않은 지급은 완료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우빈은 그 문장을 오래 읽었다. 세상을 바꾸는 원칙은 거대한 선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 하나를 함부로 받지 않는 것, 누가 대신 서명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 틀린 기록을 고칠 수 있게 남겨 두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저녁 무렵, 그는 오래된 연화빌라 앞으로 걸어갔다. 건물의 지하실은 관리기관이 봉인한 채였다. 계단 입구에는 평범한 통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검은 종이도, 숫자가 흐르는 문도 보이지 않았다. 우빈은 문을 열어 보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건물 앞 작은 벤치에 앉았다. 봄바람이 불어와 낙엽 대신 새 잎을 흔들었다. 오래전 그가 처음 금고를 열었던 날과는 전혀 다른 계절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우빈은 잠시 화면을 보다가 받았다. “정우빈 씨 맞으십니까?” “네.” “그때 도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제 이름은 공개하지 않아도 돼요. 다만 감사하다는 말은 드리고 싶었어요.” 우빈은 목이 메었다. 누가 어느 기록에서 벗어났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상대가 허락하지 않은 이름을 알아내지 않고도 고마움을 받을 수 있었다. “저도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자 옆자리에 소라가 앉았다. 그는 작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따뜻한 붕어빵 두 개가 있었다. “이번에는 외상 아니에요.” 소라가 말했다. 우빈은 웃었다. “영수증은요?” “받아 두었죠. 혹시 몰라서.” 두 사람은 종이봉투를 사이에 두고 한동안 말없이 먹었다. 거리에 사람들이 오갔다. 대부분은 금고가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래도 세상은 전보다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적어도 어떤 장부에서는 사람의 침묵이 더 이상 동의로 계산되지 않았다. 태수에게 전화가 왔다. “우빈아, 집에 올 때 두부 한 모만 사 오너라.” “네. 다른 건요?” “없다. 어머니가 오늘 찌개 끓인다신다.” 전화를 끊은 우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라가 물었다. “어디 가요?” “두부 사러요.” “그게 다예요?” “네. 오늘은 그게 다예요.” 그리고 그는 골목의 불 켜진 가게로 걸어갔다. 이름을 대신 쓰지 않고, 받지 않은 것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이 받은 하루를 자기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처럼. 다음 날의 채무는 아직 없었다. 다음 날은 그저 다음 날이었다. — 《빚을 먹는 금고》 1부 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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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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