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들지 않았다.
버스 창문 밖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누군가는 커피를 들고 뛰었고 누군가는 아이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 앞에 섰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우빈에게는 그 사실이 오래된 신기함으로 느껴졌다. 금고와 싸우는 동안 세상의 모든 시간이 누군가의 장부에 기록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연화빌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곰팡이 냄새가 남아 있었다. 처음 금고를 발견한 날도 비가 와서 계단 벽이 축축했다. 그날 우빈은 가족의 빚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울 뻔했다. 지금은 손잡이를 잡고 서서도 문을 열지 않았다.
어머니 이명숙이 도시락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도영식이 다시 연락했니?”
“네. 금고를 돌려주면 진짜 빚도 없애 준다네요.”
명숙은 아들이 보여 준 문자를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그 밑의 작은 시간 표시를 보았다.
“네 아버지하고 내가 빌린 돈은 그 사람에게만 갚으면 되는 건 아니야. 실제 은행 대출도 있고, 공방 거래처 미지급금도 있어. 여기서 하나 없앤다고 전부 없어지는 게 아니지.”
우빈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부모를 구하겠다는 조급함이 다른 사람의 통장으로 넘어가던 그날을, 그는 잊지 못했다.
정태수는 낡은 장부를 들고 들어왔다. 무너졌던 공방의 거래 목록을 다시 정리한 것이었다. 날짜마다 실제로 빌린 돈, 실제로 받은 납품 대금, 이자가 어떻게 계산됐는지 확인이 필요한 돈을 색깔이 다른 펜으로 나누어 적었다.
“이건 내가 갚아야 한다.” 태수가 파란 줄을 짚었다. “하지만 이건 내가 받지 못한 돈이고. 이건 대출인지 보증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명숙이 장부 한편의 지워진 숫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네가 우리 대신 갚겠다고 이름 올릴 이유는 없지.”
그 순간 지하 문틈에서 검은 종이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왔다. 우빈은 종이를 손으로 집지 않았다. 종이 위의 글씨가 바닥의 물기에 비쳐 보였다.
[가족 보호 계약]
[남은 실제 채무: 전액 면제 가능]
[대가: 최초 사용자의 영구 보증]
금고의 제안은 언제나 가장 피곤하고 약해진 순간을 골라 나타났다. 소라가 전화를 받았을 때 우빈은 그 종이 사진부터 보내지 않았다. 먼저 어머니가 밥을 먹고 계신지 확인했다. 그다음 계약의 문구를 읽어 주었다.
“영구 보증은 다른 채무까지 떠맡겠다는 말일 수 있어요.” 소라가 말했다. “이번엔 아예 금고가 아니라 돈을 빌려준 기관마다 내역을 확인해 보죠.”
우빈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 채무라면 협의나 분쟁 해결 절차를 밟고, 사실이 아니라면 다투면 됐다. 어느 길도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3자의 이름을 담보로 빼앗는 지름길보다 나았다.
그날 오후 그들은 시내 상담센터에서 금융 자료를 확인했다. 은행 대출의 원금과 이자는 각기 다른 항목으로 존재했다. 도영식 측이 주장하던 채권 중에는 양도 계약이 확인되지 않은 항목이 있었고, 검은 금고가 한때 지웠다는 기록 중 일부는 전혀 다른 사람의 보증 목록에 붙어 있었다.
상담 직원이 말했다.
“모든 채권을 일괄 무효로 할 수는 없습니다. 증빙을 대조해 개별적으로 처리해야 해요.”
“그렇게 해 주세요.” 우빈이 답했다. “우리가 필요한 게 바로 그겁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녁, 우빈은 마침내 지하 문 앞에 섰다. 안에서 금고가 조용히 두 번 울렸다.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오래된 회계장부의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였다.
‘너는 나를 없앨 수 없다. 네 가족은 여전히 빚을 지고 있다.’
“맞아요.” 우빈은 말했다. “그래서 실제 채무는 제대로 해결할 거예요.”
금고의 소리가 멎었다.
“당신이 없으면 갚을 돈이 없다는 말도 안 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만든 허위 채무까지 갚진 않아요.”
지하 형광등이 몇 번 깜박였다. 금고는 더 이상 금액을 제시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처음 보았던 날짜가 검은 문 위에 떠올랐다.
[최초 사용 계약 / 검토 요청]
[정우빈 / 확인하지 않은 수령 1건]
우빈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최초의 잘못은 다른 사람의 동의 없이 빚을 없애 달라고 한 그 자신의 선택에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사람의 채무를 대신 보증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문을 닫고 올라왔다. 오늘 밤은 아무것도 금고 안에 넣지 않기로 했다.
제196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