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시가 다가왔다.
그 무렵 건물 창가에는 서서히 아침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밤새 형광등 아래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비로소 제 색을 찾았다. 우빈은 회의실 탁자에 놓인 봉투를 건드리지 않았다. 도영식 측 대리인이 자발적으로 제출하겠다고 한 자료는 관리원이 수령 과정을 남겨야 했다.
“의뢰인의 동의는 받으셨습니까?” 현정이 물었다.
“이 봉투를 폐기하라는 지시는 받았습니다.” 대리인이 대답했다. “하지만 존재하는 문서가 분명하다면 그 지시를 무작정 따를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내용 공개 범위는 법률 검토가 필요합니다.”
현정은 먼저 봉투의 외형과 반입 경위를 기록했다. 내용은 정식 접수 뒤 담당자가 열었다. 안에는 한 장의 회의록과 작은 사진 두 장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젊은 도영식과, 얼굴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 검은 양복의 남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배경은 봉산 제0제작소였다.
“도영식 씨가 금고를 만든 사람인가요?” 우빈이 물었다.
“사진만으로는 그럴 수 없죠.” 소라가 답했다. “하지만 거기에 있었다는 설명은 요구할 수 있겠어요.”
회의록에는 구체적인 지시가 적혀 있었다.
‘장기 미수령 자료의 수익화 방안. 승인자는 중앙기록관리원 자동 직무계정으로 대체한다. 승인 반려 시 반려자 이름과 서명 이미지를 최종 문서에 유지한다.’
기록을 읽던 박현정이 손을 멈췄다.
“반대했다는 증거를 승인했다는 표지로 바꾸라는 거네요.”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장부까지 속일 줄은 몰랐는데요.” 소라가 씁쓸하게 말했다.
맨 아래 참석자 명단에서 도영식의 이름은 ‘회수 수수료 설계’ 옆에 있었다. J-00의 최초 요청 담당에는 ‘백재헌 회수실’이라고 적혔고, 사용 승인을 내준 공공 쪽 담당자는 이름 대신 ‘임시 직무 승인’이라는 직인만 남아 있었다. 명령의 일부는 분명해졌지만 개인별 책임을 판단하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그때 건물 내부의 오래된 안내 스피커가 켜졌다.
[정정관리 제0호 / 자동 복구 절차 시작]
[보류 → 수령 완료 / 적용 대상: 원천 기록 12,408건]
우빈의 뒤에서 종잇장들이 솟아올랐다. 어젯밤의 괴물처럼 계산기 머리가 달린 형체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소매의 도장 찍는 사람 모습이었다. 도장 대신 달린 손바닥은 둥근 검은 잉크 자국이었다.
‘확정을 해야 모두가 편해진다.’
“누가 편해지는데요?” 소라가 물었다.
‘장부의 미완성을 없앨 수 있다.’
“장부가 불편한 거지, 사람이 불편한 게 아니군요.”
도장 손이 봉투를 향해 내려왔다. 대리인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지만 봉투를 들고 도망가지는 않았다. 현정은 서류를 금속 보관함에 넣었다. 금고의 손은 그 위에 ‘정정 완료’라는 어두운 얼룩만 남겼다. 실제 원본에는 닿지 못했다.
우빈은 종이 괴물과 말싸움을 계속하지 않았다. 복구 작업의 실행 근거를 찾아 달라고 현정에게 요청했다.
[실행 예약 생성: 2010-06-12]
[재실행 조건: 원천 지급 불명 상태 발견]
[작업 권한: J-00]
[사용 제한: 최초 지급 증빙 검토 이전에는 실행 불가]
마지막 줄은 예전부터 있었다. 다만 2010년 부칙의 ‘운영 효율’ 문장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지급 증빙은 아직 검토 중이에요.” 현정이 말했다. “그러면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거죠.”
보안책임자가 원격 복구 권한의 효력을 중지하는 정식 비상 절차를 열었다. 현정은 그동안 확보한 지급액 0원 내역, 장인호의 반려 기록, M-00의 원래 보존 규칙을 순서대로 첨부했다. 누군가 승인 도장 하나를 찍으면 끝나는 형식이 아니었다. 두 명의 담당자가 절차의 범위를 확인하고 작업을 멈췄다.
[06:00 자동 복구: 정지]
[기존 12,408건 개별 검증 상태: 유지]
[보존 중인 실물 원본: 훼손 없음]
도장 손이 비틀리며 자기 몸에 도장을 찍었다. 검은 자국이 여러 겹 겹치더니, 종이 괴물은 재가 아니라 빈 서류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우빈은 한 장을 들어 보았다. 아무 이름도 없었다. 소라가 물었다.
“끝난 거예요?”
“재실행은 멈췄어요. 하지만 승인했던 사람과 돈을 받은 사람은 아직 있죠.”
그날 오전 대리인은 도영식에게서 새 통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날카롭게 새어 나왔다.
‘봉투는 회수했나? 지금 없애지 않으면 아무도 책임질 수 없어.’
대리인은 손이 떨렸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폐기하지 않았습니다. 정식 절차로 보존 요청을 했습니다.”
통화가 끊어졌다.
곧이어 우빈의 휴대전화에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검은 금고를 돌려주십시오. 본인 가족의 실제 채무는 그때 정산해 드리겠습니다.’
발신자는 도영식이었다.
우빈은 한동안 문자를 바라보다 소라에게 보여 주었다. 그녀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결국 처음부터 돈을 미끼로 썼네요.”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조건부터 확인하죠.”
그는 답장을 보내지 않고 문자를 증거로 보존했다. 오늘 자신이 하지 않을 일 하나는 분명했다.
가족의 빚을 빌미로 다시 누군가의 이름을 금고 안에 넣지는 않겠다는 것.
제19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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