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93화
PAYLUA ORIGINAL · 제193화

193화. 도장 뒤에 남은 문장

빚을 먹는 금고 · 2,356자

오프라인 책장
2010년의 인계 장부는 종이 두께부터 달랐다. 첫 장과 마지막 장은 낡은 누런 종이였고, 중간의 세 장만 유난히 희었다. 장인호의 손글씨가 남아 있는 17쪽은 가장자리가 뜯겨 있었다. 누가 일부러 한 장을 빼서 다시 끼운 것처럼 실매듭도 어긋나 있었다. “도장을 떼어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소라가 말했다. “훼손하면 오히려 상대에게 핑계가 돼요.” 현정은 작은 확대 촬영 장비를 꺼냈다. “있는 그대로 먼저 남겨요.” 야간 책임자가 촬영 과정을 입회하고, 각각의 사진에 일련번호를 부여했다. 잉크의 성분까지 그 자리에서 알 수는 없었지만 겹친 필획의 순서는 보였다. 장인호의 ‘확정 금지’ 위에 찍힌 붉은 도장은 종이의 미세한 접힘을 피해 있었다. 서류가 오래 보관돼 접힌 뒤에 도장을 찍은 흔적이었다. “그날 찍힌 게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어요.” 현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장인호 선생이 은퇴한 뒤에?” “가능성 중 하나죠. 확정하려면 감정이 필요해요.” 오전 다섯 시가 가까워지자 연락을 받은 장인호의 딸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아버지가 이미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우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금고는 이제 죽은 사람의 이름까지 빌려 자기 명령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아버지 물건을 찾으시는 거면,” 딸이 말했다. “제가 볼 수 있는 범위에서 확인하겠습니다. 그런데 주소는 알려 드릴 수 없어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우빈은 대답했다. “기록관리원 공식 절차를 통해 요청드릴게요. 원하지 않으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잠깐 정적이 흐른 뒤 여자가 말했다. “아버지는 말년에 이상한 메모를 자꾸 쓰셨어요. ‘닫힌 원에 속지 말 것.’ 무슨 뜻인지 몰랐죠.” 그 말에 소라가 고개를 들었다. “혹시 서류가 남아 있나요?” “작은 공책 하나요. 다만 제게 먼저 내용을 확인할 시간을 주세요.” 현정은 정식 요청 경로를 남겼다. 강제로 얻은 일기보다, 허락받은 한 문장이 더 오래 견딜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배웠다. 전화가 끝난 뒤 우빈은 물을 마시려고 복도로 나왔다. 복합기 아래 바닥에 긴 그림자가 누워 있었다. 종잇장들이 겹쳐 만든 사람의 손이 그의 신발 앞을 가로막았다. ‘죽은 사람의 손에 책임을 돌리면 사건은 끝난다.’ “당신들은 언제나 똑같은 말을 하네요.” 우빈이 중얼거렸다. ‘살아 있는 자들을 구하려는 제안이다.’ “죽은 사람이 반박할 수 없다고 편하게 쓰지 마세요.” 종이 손이 천천히 올라왔다. 손끝마다 장인호라는 이름이 인쇄돼 있었다. 그러나 글자 사이에는 숫자 하나가 반복됐다. [17 / 17 / 17] 현정이 우빈을 불렀다. 장부 17쪽의 훼손된 부분에서 보존용 마이크로필름 번호가 발견됐다. 반출 표에는 17번 롤이 아니라 71번 롤로 잘못 기재돼 있었다. 누군가 찾아보기 어렵도록 숫자의 순서를 바꿨을 가능성이 있었다. 실물 필름은 지하 보관고에 있었다. 담당자가 입회하지 않으면 꺼낼 수 없는 자료였다. 현정은 확보 절차를 신청했다. 금고 화면은 마치 그 선택을 기다렸다는 듯 붉어졌다. [J-00 / 미대조 자료 접근] [복구 자격 사전검사: 즉시] [정규 재시도 예정: 06:00] “서둘러요!” 당직자가 외쳤다. 우빈은 달리지 않았다. 소라가 열람실 문을 지키고, 현정은 자료 이동 기록을 남겼다. 허술하게 빼앗긴 증거 하나가 금고의 새로운 빚이 될 수 있었다. 지하 보관고의 무거운 문이 열렸을 때, 필름 상자들은 모두 같은 크기로 선반에 놓여 있었다. 17번이 없었다. 대신 71번 상자에는 손글씨가 있었다. ‘내가 정정한 것은 보관 번호뿐이다. 사람의 상태가 아니다.’ 상자 안에는 필름뿐 아니라 작은 종이 띠가 한 장 더 있었다. 숫자 71은 붉은 펜으로 쓴 것이고, 그 아래 원래 번호 17은 연필로 남아 있었다. 번호를 바꾼 흔적을 굳이 지우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 억지로 찾으려 들 때는 혼동시키고, 정식 원본 대조를 할 때는 다시 따라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현정은 장인호의 딸에게 확인 가능한 내용만 조심스럽게 알렸다. 딸은 전화 너머에서 울지 않았다. 대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고집스럽게 장부를 붙들던 이유가 있었네요. 저는 그게 일을 놓지 못하시는 건 줄로만 알았어요.” “아직 모든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현정이 말했다. “하지만 반려 의사를 남긴 자료가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딸은 잠시 뒤 정식 절차를 통해 공책의 관련 쪽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우빈은 그 대화를 들으며 죽은 사람을 대신해 사과하거나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그 사람의 입장부터 정확히 남기는 것이 먼저였다. 장인호가 남긴 문장이었다. 누군가가 다시 쓰려 했던 과거에서, 딱 한 문장만은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193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19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