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1월 3일, 새벽 세 시 십삼 분.
박현정의 모니터에는 B-000의 원장이 떠 있었다. 왼쪽에는 열두 자리가 넘는 금액이 있고, 오른쪽에는 ‘최초 선지급’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그 아래에서 파생된 채권 12,408건이 실처럼 갈라져 있었다.
“원본을 보여 줘.” 정우빈이 말했다.
현정은 열람 허가를 받은 서류를 펼쳤다. 첫 장에는 봉산 제0실험의 예상 대비비용이 있었다. 분명 4,800만 원이 필요하다고 추산되어 있었다. 둘째 장에는 그 비용이 실제로 얼마나 집행됐는지 적혀 있었다.
영 원.
셋째 장에는 그 영 원이 ‘선지급 완료’로 바뀐 뒤, 수혜자가 존재한다고 가정해 만든 수천 건의 보류 기록이 연결돼 있었다. 앞서 받은 적 없는 돈과 쓰지 않은 물품이 하나로 묶인 것이다.
“금고는 첫 장만 보여 줬어요.” 소라가 말했다.
“첫 장만 보면 정말 누군가 돈을 썼다고 생각하겠죠.” 현정이 답했다.
03시 13분 20초.
열람실의 창문이 안쪽으로 휘었다. 검은 종이가 유리 틈을 따라 기어들어 왔다. 서류철 하나가 저절로 열리고 책상 위에 긴 영수증을 쏟아 냈다. 종이들은 사람의 갈비뼈 같은 모양으로 모여 거대한 형체를 이루었다. 머리 대신 계산기가 붙어 있었고, 숫자판에는 12,408이 깜박였다.
‘정산은 예정대로 진행된다.’
목소리가 울렸다.
‘대리 발행자가 없으므로 최초 발행자의 권한이 유지된다.’
우빈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소라는 실제 서류를 보호하기 위해 현정과 함께 두 상자로 나누어 옮겼다. 이 상자에는 지급 사실이 확인된 자료만, 다른 상자에는 확인할 수 없는 자료만 넣었다. 잠시라도 둘을 섞어 놓으면 금고는 그 차이를 없애 버릴 수 있었다.
03시 13분 37초.
[개별 이의 신청 38건: 보호]
[잔여 12,370건: 정산 대기]
“서른여덟 명만 지킬 겁니까?” 소라가 물었다.
‘나머지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동의했다는 증거도 없잖아요.”
거대한 계산기 머리가 우빈을 향해 돌아갔다.
‘침묵은 수령의 추정 근거다.’
우빈은 그 문장을 기억했다. 오세림의 침묵을, 아이들의 행방을 모른다는 사실을, 주민들이 정전에 갇혀 있던 시간을 모두 금고는 동의로 바꾸려 했다.
“침묵이 동의라는 근거를 제시하세요. 아니면 보류 상태로 두세요.”
‘불충분하다.’
“그럼 누가 돈을 냈죠?”
[선지급 비용: 48,000,000원]
“그건 예상 비용입니다.”
[지급 완료]
“실제 지급 내역을 보세요.”
현정이 둘째 장을 스캐너에 올렸다. 기계는 한순간 먹통이 되었다. 종이 괴물이 다리를 뻗어 전선을 감싸 쥐었다. 소라가 전원을 잡아당기는 대신 안전한 거리로 몸을 피했다. 스캐너가 망가져도 종이 원본은 남아 있었다. 현정은 사전에 등록한 자료의 접수번호를 불렀다.
“원본 대조 번호 BS-96-002. 실제 집행액 0원. 회계장부의 세부 행과 지급 영수증 부재 확인.”
B-000이 잠시 조용해졌다.
03시 13분 48초.
[최초 선지급 증거 재검토]
[원천 발행 일치 여부: 불명]
계산기 머리의 숫자가 한 번 흔들렸다. 그때 우빈의 휴대전화에 M-00의 승인된 문장이 다시 떴다.
‘실제 수령을 확인하기 전에는 보류 기록을 채무로 바꾸지 않는다.’
우빈은 그 말을 자기 목소리로 읽었다. 누군가의 증언을 멋대로 편집하거나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출처는 비공개 증인의 공개 허용 진술로 명시했다.
“그 규칙을 먼저 만든 기록이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지금 새로 요구하는 특혜가 아닙니다.”
현정은 1996년 미확정 보존 인장의 반려 사유와 도면을 보여 주었다. 열린 원은 '지급 완료'가 아니라 '확인 중'이었다. 금고는 원을 닫은 문서를 제시하지 못했다.
03시 13분 58초.
영수증 괴물이 소라의 머리 위로 몸을 구부렸다. 계산기 숫자판에 있던 숫자들이 한꺼번에 붉게 변했다.
‘마지막 제안. 정우빈 한 사람의 이름으로 모든 기록을 확정하라.’
우빈은 한 발 나섰다. 아버지가 마주할 죄책감과 어머니의 걱정이 머리를 스쳤다. 자신만 서명하면 끝나리라는 약속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제 이름으로는 다른 사람의 삶을 수령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도 구하지 못한다.’
“아닙니다. 아직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을 없애지 않겠습니다.”
그는 빈 종이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현정이 제출한 문서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공통 발행의 지급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개별 수령 여부가 독립적으로 검증될 때까지 자동 정산을 유예할 것. 실제로 발생한 지급·임금·보상금 청구권은 별도 보존할 것.’
03시 14분 00초.
전등이 모두 꺼졌다.
창문 밖 도시의 소음까지 사라졌다. 영수증 괴물의 갈비뼈를 이루던 종이들이 허공에서 멈췄다. 누군가 길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원천 발행 지급 증빙: 불충분]
[일괄 정산: 중지]
[보류 원본 12,408건: 개별 검증 전환]
[기존 미지급 임금 및 확인된 보상금 기록: 보존]
실내에 켜 둔 비상등이 돌아왔다. 현정이 보관한 접수번호가 화면에 다시 표시됐다. 실제 지급 내역과 미지급 청구는 두 폴더로 나뉜 상태였다. 무엇보다 사라지던 이름들이 하나씩 돌아왔다. 번호표로만 남았던 사람들이 그 번호를 다시 찾을 수 있는 상태가 됐다.
우빈은 그날 관리실에서 구급상자 앞을 지키던 황복자를 떠올렸다. 자기 동의를 요구하는 그 평범한 말이 수만 건의 기록을 지탱하는 원칙이었다. 누군가 공짜로 준다고 해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고, 아직 받지 못했다면 기다려 달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
소라는 무너지는 종이들 사이에서 우빈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끝은 차가웠지만 떨림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더는 누군가에게 돈을 빚졌다는 통지가 날아들지 않았다. 적어도 이 새벽에는 그랬다.
그러나 현정은 화면을 보고 웃지 않았다. 정산이 중지된 자리에서 다른 항목이 깨어나고 있었다.
[일괄 정산 중지 사유: 최초 발행 근거 불명]
[원천 장부 생성 경위 감사: 개시]
[감사 대상: B-000 운영 기록]
“이제 찾을 수 있겠어요.” 현정이 말했다.
“누구를요?”
“돈을 낸 사람인 척한 게 누구인지요. 시스템이 아니라, 이 규칙을 바꾼 사람.”
B-000의 기록 최하단에서 감춰져 있던 관리 로그가 열렸다. 1996년의 첫 결제 기록은 없었다. 대신 그것을 나중에 '지급 완료'로 고쳐 적은 날짜가 나타났다.
[원본 입력: 1996-10-02 / 미확정]
[상태 변경: 2010-06-12 / 지급 완료]
[변경 승인: 실물 도장 없이 원격 승인]
[승인자 코드: J-00]
우빈은 오래전 자기 집의 가족관계 코드 H-001이 만들어진 날을 떠올렸다. 바로 2010년 6월 12일. 출생 전의 채무가 생겼던 시점과 같은 날이었다.
소라가 한숨처럼 말했다.
“그날 누군가 금고 밖에서 장부 전체를 바꿨네요.”
우빈은 황동 열쇠를 손에 쥐었다. 이제 문을 열 방법이 아니라 누가 문을 잠갔는지 찾아야 했다.
관리 로그에 마지막 문장이 나타났다.
[J-00 최종 접속: 오늘 03:14:01]
[접속 장소: 중앙기록관리원 내부]
누군가 방금, 바로 이 건물 안에서 B-000의 정산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19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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