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급상자에는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없었다.
연화빌라 관리실에는 빨간색 손잡이가 달린 플라스틱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새 상품처럼 보였지만 배송 송장에는 금액이 없고 날짜도 비어 있었다. 관리인 황복자는 방문자가 두고 가려 한 물건을 집 안으로 들이지 않게 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집에 보내는 것도 아니고, 빌라 주민 전체를 위한 거라면서요.”
정우빈은 어머니에게 먼저 다가가 안부를 물었다. 명숙은 놀랐지만 다친 곳은 없었다. 아버지 정태수도 관리실에 내려와 있었다. 그는 상자에 손을 대지 않고 멀찍이 서 있었다.
“옛날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태수가 말했다.
“무엇이요?”
“손잡이 부분. 그 공장에서 쓰던 모양이랑 비슷해.”
현정은 관리인의 협조로 포장 상태를 촬영했다. 상자 손잡이에는 푸른색 선이 그어져 있었다. 1996년 구급상자의 붕대에 그어졌던 것과 같은 색이었다. 하지만 이 물건이 동일한 회사 제품인지 확인할 근거는 없었다.
그때 상자 밑에서 작은 종이가 미끄러져 나왔다.
[무료 안전 물품 수령 안내]
[수취인: 연화빌라 전 세대]
[미수령 시에도 보관 및 배송 완료]
“거절할 수 없는 선물이네요.” 명숙이 말했다.
“선물이 아니라 수령 기록을 만드는 거예요.” 소라가 답했다.
우빈은 관리인에게 실제 받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기록해 달라고 요청했다. 황복자는 모든 세대가 상자를 필요로 하거나 원한다고 추정할 수 없었다. 주민 대표와 안전 관리업체가 상태를 확인하도록 연락을 돌렸다.
황복자는 오래된 주민 공책을 펼쳤다. 정전이 났던 밤의 실제 수리 내역이 시간별로 적혀 있었다.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아이를 안고 계단을 내려왔던 젊은 부부의 이름, 승강기 앞에서 길을 비켜 준 할아버지의 이름도 있었다. 모두 서로 도왔지만 누구도 그 도움을 계약서로 만들지 않았다.
“그날 우리가 한 일을 돈으로 따지면 끝이 없겠지.” 황복자가 말했다.
명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도와준 사람들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우빈은 그 말이 좋았다. 빚을 부정한다는 것은 서로 받은 도움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었다.
몇 시간 뒤 구급상자는 오히려 불길한 소리를 냈다. 아무도 만지지 않았는데 뚜껑 안쪽에서 종이 찢기는 소리가 났다. 플라스틱 표면에는 검은 손자국이 하나씩 나타났다. 상자가 관리실에서 복도 쪽으로 천천히 밀려 나왔다.
‘무료입니다.’
낯선 목소리가 반복됐다.
‘받으세요. 쓰기만 하면 됩니다.’
한 주민이 화를 냈다.
“위험한 물건이면 그냥 버리면 안 돼요?”
“먼저 가까이 가지 마세요.” 우빈이 말했다. “관리 직원하고 안전한 처리를 상의해야 합니다.”
그는 검은 금고가 남의 물건을 만졌다는 사실만으로 수령을 만들던 모습을 떠올렸다. 상자를 열면 무료 물품을 받았다는 기록이 생길 수 있었다. 버리면 폐기 책임이 생겼다고 적을 수도 있었다. 움직이는 상자를 함부로 조작할 수 없었다.
현정은 현장을 고립하고 사람들을 물렸다. 소라는 관리실 밖에서 주민들의 진술을 따로 적었다. 한 노인은 방문자가 '산업안전 후원'이라고 말했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재난 대비 정산'이라는 명찰을 봤다고 했다. 서로 다른 기억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도영식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상자는 문턱에 걸려 있었다.
“이런 걸 보내는 놈들한테 속을 뻔했네.”
그가 무심코 상자를 발로 밀려 하자 우빈이 팔을 붙잡았다.
“우리 대신 처리해 줄 필요 없어요.”
“그럼 그냥 구경만 하란 말이냐?”
“증거를 보관하는 데 협조해 주세요. 멋대로 움직이는 건 도움이 아니에요.”
도영식은 헛기침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몸이 먼저 나가는 성격이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우빈의 말을 따랐다.
상자는 문턱을 넘어가려다 그 자리에 멎었다. 누군가 선을 그어 둔 것처럼 한 뼘 앞을 넘지 못했다. 손잡이에 그어진 푸른 선이 희미하게 빛났다.
[수취 확정 조건 미충족]
[실물 전달 증거 없음]
명숙이 조용히 말했다.
“누가 무료로 준다고 해서 우리가 받았다는 뜻은 아니지.”
그 말을 들은 순간 뚜껑의 검은 손자국이 하나씩 지워졌다. 마치 상자도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사건이 끝나지는 않았다. 관리인에게서 새 공지가 올라왔다. 같은 물건이 서람시의 다른 아파트 열한 곳에도 배달됐다는 것이다. 몇 군데에서는 이미 주민들이 구급상자를 열었고, 누군가는 실제로 소독약을 사용했다.
“그분들은 어떻게 해요?” 소라가 물었다.
우빈은 잠시 생각했다.
“물건을 실제로 쓴 건 사실이잖아요. 하지만 그걸 썼다고 삼십 년치 빚을 인수한 건 아니죠. 받은 물건의 가치와 계약 없는 채무를 분리해야 합니다.”
소라는 미소를 짓지 않았다. 대신 앞에 놓인 기록지를 한 장 더 꺼냈다. 그들을 지킬 방법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 M-00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푸른 선은 금고의 잠금 장치가 아닙니다. 누구의 선택인지 확인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표시입니다.’
그 아래에는 그동안 공개된 적 없는 짧은 녹취록이 있었다.
‘나는 도장을 찍지 않았다. 다만 어떤 사람도 대신 서명할 수 없다고 적었다.’
그리고 오디오가 끝나기 직전, 종이를 넘기는 소리 뒤로 어린아이의 울음이 들렸다.
제18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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