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 외부 결제실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
우빈은 처음 그 명칭을 들었을 때 거대한 지하 금고를 상상했다. 그러나 현정이 찾아낸 주소는 서람시 산업단지의 평범한 사무용 건물이었다. 일층에는 프린터 수리점이 있었고, 이층에는 인터넷 쇼핑몰의 반품 창고가 있었다. ‘외부 결제실’이라는 간판은 없었다.
주소를 알려 준 것은 오세림이 아니었다. 제0실험의 옛 회계 자료에 월별 우편 요금 청구서가 붙어 있었다. 봉산이 다른 회사로 자료를 보낼 때 봉투를 맡기던 곳이었다. 상호는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사서함 번호가 같았다.
“허락 없이 들어가는 건 안 됩니다.” 현정이 말했다.
“알아요. 임차인과 관리사무소부터 확인하죠.”
관리사무소 직원은 현정의 정식 자료 열람 신청서를 읽고 난 뒤, 상층에 보관실이 있었다고 알려 주었다. 지금은 폐쇄됐고, 우편물도 더는 받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과거 임대차 대장 사본을 제공할 수 있는 절차를 안내했다.
우빈은 창문 밖에 놓인 오래된 사서함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사서함만 새것처럼 깨끗했다. 검은 입구에는 종이가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도영식이 먼저 도착했다. 평소처럼 검은 점퍼를 입었지만 손에 들린 것은 채권 서류가 아니라 작은 서류철이었다.
“내 이름으로 된 미수령 채권이 여섯 개래.”
“돈을 빌려준 사람들 말인가요?”
“아니. 내가 돈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적혀 있어. 그런데 난 그런 돈 빌려준 적 없어.”
그는 서류철을 열었다. 채권 명의자는 분명 도영식이었지만 채무자 이름 일부는 원래 연락처조차 없던 사람들이었다. 일종의 명의 대여였다.
“이걸 갖고 있으면 돈이 들어오는 줄 알았지?” 소라가 쏘아붙였다.
“그런 줄 알았던 적도 있지. 근데 이번 건은 아냐. 누가 내 이름을 도용한 건지 확인하고 싶어.”
도영식이 사본 한 장을 따로 뽑아 내밀었다.
그의 손끝에는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밤새 차를 수리하고 왔다고 했다. 예전 같으면 남의 빚을 수수료로 바꿀 기회에 피곤함 따위를 느끼지 않았을 사람이었다. 소라는 그 손을 보고도 쉽게 마음을 풀지 않았다. 도영식 때문에 집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하던 날들을 잊을 수는 없었다.
“지금 돕는다고 지난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알아. 그걸 바라지도 않아.”
도영식이 잠시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오늘도 네 앞에 내 장부를 꺼내 놓은 거야.”
그것은 변명이 아니라 아직 미완성인 사과처럼 들렸다. 거기에는 놀라운 문구가 있었다.
[채권 매수인: 해당 없음]
[채권 보유자: 장부상 명의만 기재]
[실제 수익 귀속: B-000]
현정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에게 지급하려고 수익자를 적은 게 아니네요. B-000이 돈을 받기 위해 사람 이름을 표지로 쓰는 거예요.”
그때 사서함 안에서 철판이 두 번 울렸다. 우빈이 고개를 돌리자 입구가 길게 벌어졌다. 금속 안쪽에서 회색 손가락 하나가 나오더니 우편물을 집어넣는 척했다. 손가락이 물러난 자리에는 봉투가 남았다.
[수익자 확인 통보]
[열람하면 지급 청구 가능]
“또 열어 보라고 하는군.” 도영식이 말했다.
우빈은 봉투를 만지지 않았다. 관리 직원에게 현장을 알리고 사진으로만 상태를 기록했다. 현정은 봉투가 실제로 도착한 우편물인지, 장치가 만들어 낸 표식인지 확인 전에는 받는 사람 이름을 적을 수 없다고 했다.
그 순간 건물 유리문에 검은 양복의 남자가 비쳤다. 실제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리 속 남자는 네 사람을 바라보다가 서류철을 펼쳤다.
‘원금을 없앨 수는 있어도, 보관된 시간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들었다는 사실과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해야 하는지는 다릅니다.” 현정이 말했다.
남자는 웃었다.
‘그렇다면 당신들 시간이 얼마나 비싼지 확인해 보죠.’
사서함의 작은 숫자판이 움직였다.
[일괄 정산까지 14:26:11]
우빈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2026년 11월 2일 오후였다. 예정된 새벽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날 저녁 관리사무소의 협조로 확인한 임대차 대장은 마지막 수익자를 가리키지 않았다. 대신 결제실이 처음부터 일반 은행 계좌가 아니라 시험 장비의 오류 계정을 처리하는 ‘조정 서버’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람에게 돈을 돌려준다고 주장했다. 누가 받았는지 확인할 담당자가 없을수록 거래는 빨라졌다.
“이제 왜 금고가 자꾸 빈칸을 사람 이름으로 채우려 했는지 알겠어요.” 소라가 말했다.
그 순간 우빈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였다.
“우빈아, 아까 어떤 남자가 집에 와서 네 이름으로 구급상자를 보냈다는데, 우리가 받아도 되는 거니?”
우빈은 창 밖이 아니라 휴대전화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머니, 아직 받지 마세요. 방문한 사람의 소속부터 확인해 주세요. 제가 관리실에도 연락할게요.”
수화기 너머에서 명숙이 낮게 대답했다.
“그래. 문도 안 열었어. 그런데 그 남자가 말하더라. 금고 밖에서 누군가가 이미 비용을 냈다고.”
제18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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