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람시 외곽의 옛 재난대응교육관은 지금 작은 실내 체육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페인트를 새로 칠한 벽에는 배드민턴 동호회 광고가 붙어 있었고, 신발장 한 칸에는 누군가 놓고 간 분홍색 운동화가 있었다. 우빈은 이곳에 1996년 교육생 명부가 남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둠 속 지하실을 상상했다. 현실은 오후 햇빛이 비치는 평범한 운동장이었다.
안내를 맡은 관리자는 서고 열람을 허락하면서 먼저 말했다.
“없는 자료가 많습니다. 이사하면서 버린 게 많아서요. 없는 걸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게 오히려 중요합니다.” 현정이 대답했다.
세 사람은 먼지를 털어 낸 파일철에서 ‘피해 발생 전 대피 훈련’ 항목을 찾았다. 한 페이지에는 참석자에게 무료로 제공된 방재 교육과 비상 연락망이 적혀 있었다. 그 바로 다음 페이지에는 교육관에 지급될 예정이었던 예산이 쓰여 있었다.
[대비비용 산정: 48,000,000원]
[실제 집행: 0원]
[사후 정산 기준: 예상 수혜 인원]
“예산이 책정됐다고 집행된 건 아니잖아요.” 우빈이 말했다.
“그렇죠. 그런데 이 장부에는 예상 수혜 인원을 실제 수령자처럼 적어 놨어요.” 현정이 짚었다.
소라는 벽에 걸린 당시의 단체사진을 바라보았다. 아이와 어른이 섞인 동네 주민들이 운동장에 서 있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지금껏 자신이 받은 적 없는 돈을 갚으라는 통지를 받고 있었다.
사진의 맨 앞줄에 서 있던 소년은 지금 쉰 살이 넘었을 것이다. 당시 맡았던 역할은 대피할 때 맨 먼저 문을 열어 보는 것이었다고 관리자가 알려 주었다. 가족의 연락처는 이미 기록에서 지워졌지만, 오래된 훈련 후기에는 '문이 무거워 선생님이 도와주었다'는 그의 글씨가 남아 있었다.
소라는 그 대목에서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열어 준 사람에게 감사할 수는 있어요. 그걸 이용해서 평생 빚을 지라고 하긴 어렵죠.”
관리자는 대답 대신 액자에 묻은 먼지를 닦았다. 당시 아이들이 배운 건 대피 순서이지, 채무 계약서를 읽는 법이 아니었다. 우빈은 사진을 휴대전화에 담기 전에 관리자에게 사용 허락부터 구했다.
그때 체육관 바닥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코트 중앙의 하얀 선들이 살짝 일그러졌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표시선을 긁어내는 듯했다. 소라가 뒤로 물러나자 바닥에서 종이 팔이 솟았다. 영수증 수백 장을 두껍게 감아 만든 팔이었다.
‘대피하셨습니까?’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는 질문에 체육관의 스피커가 덜컹 울렸다.
[대피행동 확인 시 무상 구조 서비스 수령으로 간주]
관리자가 놀라 우빈을 돌아봤다.
“지금 밖으로 나가도 됩니까?”
“나가셔도 됩니다. 다만 저 문구에 동의한 건 아닙니다.”
우빈은 관리자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당장 나가야 할 사람을 보호해야 했고, 동시에 ‘대신 보호를 수령했다’는 기록을 남겨서는 안 됐다. 소라가 119에 이상 상황을 신고하는 동안 세 사람은 안전한 출입구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바닥의 종이 팔은 뛰어가는 발목을 향해 휘둘렀지만, 문을 나선 사람마다 그 어깨 위에 붉은 번호표를 붙이는 데 실패했다.
“저건 사람을 다치게 하려는 걸까요?” 관리자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다치게 하든 안 하든, 누가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을 만들려는 것 같아요.” 우빈이 대답했다.
건물 밖으로 나온 뒤 우빈은 자신이 세운 가설을 소리 내어 확인했다. 피난 자체는 인간이 하는 행동이었다. 길을 열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의 노동에는 대가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하지 않은 구조를 이미 제공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나래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서류에 남아 있던 작은 기호를 기억했다. 1998년 사고 당시 보존된 아이들의 기록과 같은, 끝이 열린 푸른 원이었다.
“그 표시가 여기에도 있어요?”
“네. 교육관 예산표에도 있습니다.”
“그건 돈을 받은 표가 아니에요. 준비 중이라는 표였어요. 누군가 원을 닫으면 받았다는 뜻이 됐고요.”
“왜 그런 표를 만들었죠?”
“아이한테는 나중에 돌려줘야 할 물건이 많았어요. 이름을 모르는 동안 잃어버리지 않게 하려고요.”
나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원래는 기다리라는 뜻이었는데, 누가 그걸 정산 완료 도장으로 바꾼 거예요.”
현정은 원의 열린 끝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그 흔적은 교육관 사진과 안전 교육 이수증, 1996년의 구급상자 영수증에도 있었다.
이때 M-00에게서 새로운 문자가 왔다.
‘예상 비용을 먼저 빚으로 바꾼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돈을 받은 건 아닙니다.’
뒤이어 짧은 문장이 더해졌다.
‘원본 인장을 찾으려면 정산을 준비한 손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한 손을 찾으십시오.’
제18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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