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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82화
PAYLUA ORIGINAL · 제182화

182화. 먼저 낸 사람

빚을 먹는 금고 · 2,316자

오프라인 책장
오세림은 사진을 보자마자 손을 감쌌다. 정우빈은 그 반응이 사진 속 손의 주인을 알아봤다는 뜻인지, 단순히 그날의 추위를 기억했다는 뜻인지 단정하지 않았다. 세림은 1996년 봉산 제0제작소의 검사 담당자였다. 하지만 실물 금고를 받지 않았다는 증언 이후에도 누군가는 그녀를 수취인으로 기록하려 했다. “이 천 조각은 뭡니까?” 소라가 물었다. 세림은 오래된 안경을 벗었다. “응급용 붕대요. 우리 공장은 안전 교육 때 천에 파란 선을 그었어요. 지급된 것과 지급되지 않은 걸 구분하려고요.” “저 사진은 언제 촬영됐을까요?” “모르죠. 손도 제 손인지 확실하지 않아요. 다만 그때 우리한테 같은 줄이 그어진 붕대가 있었어요.” 현정은 사진을 원본 기록과 비교했다. 파일의 작성 시각은 최근이었지만, 사진 아래쪽에는 원래의 인화 번호가 잘려 있었다. 누군가 낡은 사진을 다시 촬영한 것이다. 출처를 확정할 수 없으니 바로 증거로 제출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세림은 집에서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그 안에는 공장 직원들이 각자 서명한 구급상자 점검표가 들어 있었다. 1996년 10월, 구급붕대 여덟 개가 분명 지급되었다. 반면 '재난 사전 수습비'라는 항목에는 금액만 적혀 있었다. [선지급 비용: 0원] [미확정 수혜자: 전 직원] [정산 방식: 차후 적용] “영 원인데 선지급이라니.” 소라가 중얼거렸다. “구급상자를 샀다면 누가 돈을 냈는지 알 수 있어야 하잖아요.” 우빈이 말했다. 세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회사 운영비였어요. 급여에서 뗀 게 아니라 회사가 사야 할 물건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직원들 가슴에 붙는 안전표가 바뀌었어요. ‘무상 보호 대상’이라고.” “무상 보호는 좋은 말 아닌가요?” “그 당시엔 그랬죠. 문제는 다른 서류에 ‘사전 수혜자’라고 적혔다는 거예요. 받은 게 없는 사람에게 이미 받았다고 쓰는 순간, 보호가 채무가 됐어요.” 세림은 그때 한 장의 쪽지를 따로 꺼냈다. 1996년 구급상자 점검표의 뒷면이었다. 붕대는 여덟 개, 소독약은 세 병, 사용 후 남은 수량은 각기 다른 필체로 기재돼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 손수 세어 둔 숫자였다. “우리는 쓴 걸 숨기지 않았어요.” 세림이 말했다. “다만 썼다는 사실 때문에 아직 다치지도 않은 사람의 치료비를 미리 빚으로 만들지는 않았죠.” 소라는 한동안 쪽지를 바라봤다. 그녀의 어머니가 남긴 장부에도 받지 못한 보상금이 꼼꼼히 기록돼 있었다. 이제 그 꼼꼼함이 약점이 아니라 사람을 지키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오후 우빈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수는 구급상자 제작 업체의 영수증을 기억했다. 자신이 외함을 납품하러 갔을 때 작업대 옆에 큰 구급상자가 있었고, 직원들이 손을 베이면 거기서 붕대를 꺼내 쓰곤 했다고 했다. “누구 돈으로 샀는지는 모르지. 하지만 사람들이 빌려 간 물건은 아니었어.” 우빈은 말없이 메모했다. 자기가 아는 부분만 말하는 아버지의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믿음직했다. 저녁에는 도영식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먼저 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한테도 봉투가 왔다. 보류 채권을 회수하면 수수료 준다더라.” “받지 마세요.” “안 받았어. 대신 사진은 찍었지. 채권자 이름이 전부 달랐는데 입금 계좌는 하나야.” “어디로 들어갑니까?” “봉산이란 이름은 없어. ‘선행관리계정’이라고만 돼 있어.” 그는 말을 멈추고 물었다. “너희가 이걸 없애면, 나처럼 진짜로 돈 빌려준 사람까지 못 받게 되는 건 아니지?” 우빈은 쉽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진짜 빌려주고 진짜 갚기로 한 돈은 따로 확인해야죠. 누가 없는 빚을 만든다고 해서 실제 거래까지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어요.” 전화 너머에서 도영식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말은 믿을 만하네. 나도 지금껏 잘못 적은 장부가 있으니까.” 도영식이 보내온 사진에는 계좌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상위 정산을 승인하는 인장 옆에 어떤 문구가 찍혀 있었다. [승인 조건: 최초 선지급 영수증 제시] 현정은 자료를 겹쳐 놓고 말했다. “영 원짜리 선지급 영수증을 증명해야 12,408건을 정산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반대로 그 영수증이 거짓이면?” “우리는 적어도 일괄 정산을 멈출 근거를 얻을 수 있죠. 모든 개별 사건이 자동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어도요.” 우빈은 사진 속 붕대를 다시 보았다. 아무것도 받지 않았던 사람에게 누가 먼저 냈다고 주장하는가. 그것이 B-000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사진 아래쪽, 미처 보지 못한 작은 도장이 눈에 들어왔다. ‘1996. 10. 02 / 제0실험 / 대비비용 추정.’ 지급이 아니라 추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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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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