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빈의 휴대전화에는 처음 보는 숫자가 떠 있었다.
12,408.
한 사람이 갚기에도 버거운 빚을 금액으로 적어 놓았다면 차라리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원화도, 날짜도 아니었다. 한 번도 수취가 확인되지 않아 보류된 사람들의 기록 개수였다.
[상위 정산 계정 B-000]
[대상: 12,408건]
[2026-11-03 03:14 일괄 정산 예정]
[수익자: 최초 채무를 발행한 자]
식탁에서 정태수는 아들의 화면을 보지 않았다. 대신 밥공기 곁에 놓인 황동 열쇠만 바라보았다. 고장 난 문을 수리하던 사람에게 열쇠란 늘 한 개의 문을 여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저 열쇠는 문을 열지 않은 사람이 책임을 뒤집어쓰지 않도록 만든 장치에 속해 있었다.
“또 밖에 나가야 하냐?” 태수가 물었다.
“내일 아침에 현정 씨 만나기로 했어요. 지금은 자료만 정리하려고요.”
“이번에는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 이름을 찾는 일이겠지.”
“누구 이름을 찾더라도 먼저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했는지 확인할 거예요.”
어머니 이명숙이 국그릇을 내려놓았다. 가족이 모인 식탁에 한 번도 먹지 않은 저녁이 식어 가고 있었다. 명숙은 아들의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일단 밥부터 먹어. 네가 놓친 저녁도 누가 대신 먹어 주진 않아.”
우빈은 젓가락을 들었다. 평범한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다음 날 오전, 중앙기록관리원의 임시 열람실에는 종이 상자 세 개가 놓였다. 박현정은 밤새 출력한 대상 목록을 엎어 두었다. 김소라는 큰 종이에 세 개의 원을 그렸다. ‘실제 수령’, ‘미수령’, ‘확인 불가’. 누구든 마지막 원에서 첫 번째 원으로 넘어가려면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했다.
“목록을 다 조사하면 되지 않아요?” 우빈이 말했다.
“한 건에 삼 분씩만 써도 육백 시간이 넘어요. 그런데 우리에게 남은 건 이틀도 아니에요.”
현정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피곤했다. 그는 목록을 세 갈래로 나눈 기준부터 공개했다. 상당수는 이미 돌아간 물건의 보증서였고, 일부는 임금과 보상금이었으며, 나머지는 오래된 대피 안내나 안전 점검 기록이었다. 형식부터 달랐다. 숫자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조치를 할 수 없었다.
소라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 사람은 집이 무너졌는데 보수비를 안 받았대요. 보수받지 않았으니 왜 이자까지 내야 하는 거죠?”
“미수령 기간을 관리비로 환산한 겁니다. 금고가 즐겨 쓰는 방식이죠.”
“실제로 관리한 사람은요?”
현정은 대답하지 못했다. 관리비를 청구하는 회사 이름만 있고 사람이 없었다.
그 순간 복도에서 종이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열람실 문 밑으로 길고 얇은 영수증이 밀려들어 왔다. 한 장, 두 장, 열 장. 종이 끝에는 사람의 손톱 같은 검은 점이 박혀 있었다. 문고리를 내리지도 않았는데 손잡이가 안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정산 대상 사전 확인]
[대상자 대리 열람 시 수령 동의 인정]
우빈은 서류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아무도 목록을 대리 수령하지 않았어요. 열람과 수령을 같은 뜻으로 쓰지 마세요.”
영수증들이 문틈에서 서로 감겨 굵은 줄이 되었다. 소라가 열람실의 비상벨을 눌렀고, 당직 직원들이 복도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줄은 곧바로 문고리를 놓았다. 그러나 문 아래에는 영수증 한 장이 남았다.
[열람실 참석 인원: 3명]
[참석 사실: 확인 완료]
[수령 의사: 자동 추정 실패]
현정이 그것을 집게로 들어 투명 봉투에 넣었다.
당직 직원이 함께 들어와 상황을 확인했다. 그는 문 아래의 긁힌 자국을 보고 외부 침입 여부부터 물었다. 현정은 섣불리 범인을 단정하지 않고 발견 시각, 동석자, 움직이는 종이를 본 사실을 각각 분리해 적었다. 우빈은 그 짧은 절차가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방금 눈앞에 괴물이 나타났는데 서식의 빈칸을 채우는 일이 무슨 소용일까.
그런데 직원이 기록의 마지막 줄을 읽었다.
“여기에는 아직 책임자가 정해져 있지 않네요. 그건 그대로 두겠습니다.”
우빈은 문득 숨을 골랐다. 이상한 일이 벌어질 때 가장 먼저 누군가에게 죄를 씌우던 것은 늘 금고였다. 평범한 사람이 ‘모른다’를 기록하는 모습은 그보다 훨씬 용감해 보였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까지 알고 있네요.”
“그게 이상한가요?” 소라가 말했다. “우리는 계속 자기 이름을 알아 달라고 서류를 찾잖아요. 저것들은 우리가 보는 것만으로도 동의했다고 만들어요.”
오후가 되자 목록에서 놀라운 규칙 하나가 발견됐다. 12,408건의 기록에는 서로 다른 소유자와 날짜가 있었지만, 모든 청구서의 원본 번호 맨 앞에는 같은 두 글자가 있었다.
B0.
그리고 수익자 칸에 해당하는 작은 박스에는 돈을 받을 사람 대신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먼저 냈으므로 나중에 받는다.’
우빈은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누가 무엇을 먼저 냈다는 설명이 없었다.
그날 밤 M-00이 보낸 메시지가 다시 울렸다.
‘첫 번째 빚을 찾으려면 금액부터 보지 마십시오. 지출한 사람의 손을 보십시오.’
메시지 뒤에는 손바닥을 촬영한 낡은 흑백사진 한 장이 첨부돼 있었다. 먼지투성이 손 위에 작은 흰 천 조각이 올려져 있었다.
우빈은 사진을 확대했다. 천 조각에는 낯익은 푸른 줄이 그어져 있었다.
제18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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