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림이 약속한 장소는 법률사무소도 경찰서도 아니었다.
작은 양복 수선점이었다. 오래된 미싱 두 대와 소매 길이를 표시하는 분필이 진열된 가게에서, 회색 머리를 짧게 자른 여자가 차를 끓이고 있었다. 그녀는 대리인과 함께 있었다. 우빈은 상대가 실제 오세림이라는 확인을 마친 뒤에야 준비한 서류를 펼쳤다.
“저는 푸른 금고를 직접 인수한 적이 없습니다.”
여자는 첫 마디부터 그 사실을 말했다.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지만, 손가락으로 찻잔 손잡이를 두 번 문지르는 버릇이 있었다.
“당신 아버지가 본 사람은 저일 겁니다. 그날 비가 왔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검사표를 들고 옆에 섰고, 수레를 민 건 작업복을 입은 다른 사람이었어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정확히는 모릅니다. 작업번호가 07이었죠. 제0제작소에서는 사람을 이름보다 번호로 불렀어요.”
현정이 출입 기록의 누락 부분을 보여 주었다. 세림은 날짜보다 한 줄 아래를 가리켰다. ‘시험 미승인 / 실물 이전 불가’. 그녀가 그날 끝까지 지키려 했던 문장이었다.
“저게 왜 지워졌는지 아세요?” 우빈이 물었다.
“제가 검수를 거부했으니까요. 보류 장치는 원래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도록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회사는 보류되는 시간만큼 관리비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기다림 자체를 상품으로 만든 겁니다.”
소라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면 붉은 금고는 그 반대로 쓰였고요.”
“네. ‘확인되기 전이라도 받았다고 처리한다.’ 그게 붉은 금고가 만들어 낸 재앙이에요.”
세림은 잠시 미싱 쪽을 돌아봤다. 가게는 그녀가 운영하는 곳이 아니었다. 다만 오래전 친구가 공간을 빌려 주었다고 했다.
“여러분이 찾는 푸른 상자는 지금 제 손에 없어요. 하지만 어디에 있었는지는 압니다.”
“어디였죠?”
“제0제작소의 지하가 아니라, 지하를 지나가는 운반대 위였습니다. 그곳에서 밖으로 반출됐어요. 수레가 멈춘 곳은 외부 물류장. 그다음 경로는 누구도 저에게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우빈은 그제야 사진 속 상자가 당장 진짜라고 믿을 수 없는 이유를 이해했다. 상자는 오래전 이미 지하를 떠났다. 최근 촬영했다는 사진은 위치를 속이거나, 같은 모양의 외함을 이용한 미끼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저희에게 오라고 하셨어요?”
“제가 직접 본 사실은 제 입으로 설명할 수 있으니까요.”
세림이 손목에 감은 낡은 줄자를 풀었다. 그 안쪽에는 세 자리 숫자가 잉크로 적혀 있었다.
‘207.’
“처음에는 아무 뜻도 모르는 번호였어요. 제가 떠난 뒤에도 이 숫자를 지우지 못했죠. 혹시 언젠가 누가 푸른 상자를 열게 된다면, 그 사람이 제 이름으로 무엇을 받았다고 쓸까 봐요.”
현정은 숫자의 공개 여부를 물었다. 세림은 오랫동안 고민하다 보존 심사에 한해 제공하기로 했다. 우빈은 구체적인 주소나 생존 정보는 파일에서 빼기로 했다.
“아까 말씀하신 대답이란 게요.” 우빈이 물었다. “금고를 열어도 된다는 허락입니까, 아니면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하라는 겁니까?”
세림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둘은 다릅니다. 저는 기계가 시험 조건을 지켰는지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기록을 누가 공개할 수 있는지는 모릅니다. 기록에 남은 사람이 따로 있다면 그 사람도 대답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이라면요?” 소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땐 더 어렵죠. 남은 사람이 마음대로 동의했다고 적을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사실을 영원히 묻어 두어도 안 되겠죠. 그래서 절차가 필요했어요.”
세림은 처음으로 긴 한숨을 쉬었다. “저는 평생 기술자가 잘못 만든 기계 때문에 사람이 다치는 걸 무서워했어요. 그런데 이 기계는 고장이 아니라 정상 작동하면서 사람을 다치게 했습니다. 누가 그걸 설계하고, 누가 바꿨는지 밝혀 주셨으면 해요.”
가게 밖의 햇빛이 서서히 기울었다. 손님 한 명이 재킷을 맡기러 왔다가 방 안 분위기를 보고 잠시 기다렸다. 우빈은 그 평범한 방문이 오히려 좋았다. 세림 역시 과거의 번호가 아니라, 누군가가 오늘 찾아와 옷을 맡기는 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상담이 끝나 갈 무렵, 문 옆에 달린 풍경이 울렸다. 검은 양복의 남자가 가게 앞에 서 있었다. 그가 한 발 내딛자 바닥의 재단 종이가 둥글게 말리며 거대한 입을 만들었다. 입 안에서 사람이 쓰지 않은 이름들이 쏟아져 나왔다.
‘오세림. 당신은 이미 수령인입니다.’
세림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러나 우빈에게 대신 싸워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아니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검사한 사람입니다. 받지 않았고, 그 일은 지금도 바뀌지 않습니다.”
우빈은 대리인이 적어 둔 현재 진술과 1996년 검사표를 서로 다른 손에 들었다. 재단 종이의 입이 두 장 사이로 달려들었지만, 서명하지 않은 빈칸에 붙잡힐 이름을 찾지 못했다. 가게 주인이 문을 잠그자 풍경이 크게 울렸고, 검은 양복의 형상이 유리에서 찢어져 사라졌다.
세림이 숨을 고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푸른 상자를 여는 열쇠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열쇠가 아니라, 열기를 허락하는 사람의 대답이 더 중요해요.”
우빈은 손가락을 펴 황동 열쇠를 보여 주었다. 세림은 그것을 만지지 않았다.
“그걸 꽂을 자리는 제가 아는 금고 안에 없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우빈의 열쇠 머리에 새 숫자가 떠올랐다.
[207 / 미확인 반출자]
제17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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