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 열쇠는 봉산 제0제작소의 문에 맞지 않았다.
허가를 받은 시설 점검팀은 오래된 실험동의 도어락을 교체했고, 우빈은 그들의 동선을 가로막지 않은 채 밖에서 기다렸다. 열쇠를 직접 문에 넣어 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진짜 개봉 키라면, 열어야 할 순간을 아무나 정할 수는 없었다.
그날 밤 세림 측 대리인은 207이라는 번호에 관해 추가 자료를 보내 왔다. 제0제작소의 시험 인원번호가 아니라 ‘보류 반환 보관함’의 등록번호였다. 장치를 보관함에 넣어 운반하면 사람이 수령한 것으로 확정되지 않고, 단지 다른 보관 장소로 이동한 것으로만 표시됐다.
“207이 사람 번호가 아니었군요.” 소라가 말했다.
“오세림 씨도 몰랐어요. 처음에는 자신을 대신한 수령자라고 생각했으니까.” 현정이 답했다.
정태수는 아들의 설명을 듣고 서랍에서 도면 한 장을 가져왔다. 푸른 외함의 안쪽에는 작은 홈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황동 열쇠가 들어가는 구멍이고, 다른 하나는 종이를 끼워 넣는 좁은 틈이었다.
“여기에 또 다른 열쇠가 있었던 건가요?”
“종이를 넣는 데에 무슨 열쇠가 필요하겠냐. 내 기억에는 명찰 같은 걸 넣었어.”
“누구 명찰이요?”
“그걸 설명해 준 사람은 없었지.”
우빈은 그림을 소라에게 보여 주었다. 세림은 열쇠를 꽂을 자리가 자기가 알던 금고에 없다고 했다. 실제로 그녀가 검사한 것은 완성품이 아니라 내부 기능이었다. 207번 보관함에는 외함이 아닌 보존 코어가 들어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열쇠가 열어 주는 건 상자가 아니라 바깥 껍질이네요.” 소라가 말했다.
그때 도영식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검은 양복이 207번 보관함의 매입 계약서를 제시했다고 했다.
“가격이 말도 안 돼. 지금 내 빚을 전부 없애 준대.”
“대신 뭐라고 합니까?”
“한 사람을 실제 보관인으로 등록하래. 그 사람 동의는 필요 없다고.”
“계약하지 마세요.”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야.”
도영식은 통화를 끊었지만 몇 분 뒤 사진을 보냈다. 계약서 아래에는 형광펜으로 줄이 그어져 있었다.
[207번 보관함 / 실물 미수령 시 관리자 임의 대리 등록 가능]
우빈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사진의 출처와 문서의 진위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검은 양복이 수많은 사람의 빚을 미끼로 같은 거래를 반복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도면을 펴 놓고 계속 같은 부분을 문질렀다. 옛날에는 장치가 완성되면 제작자가 시험에 입회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지만, 회사는 태수를 일부러 부르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제작한 사람으로서의 기술적인 설명뿐이었다.
“아버지 책임이 남아 있는 부분이 있으면 저도 알고 싶어요.” 우빈이 말했다.
“그날 시험이 잘못될 줄 알았다는 말은 못 하겠다. 나는 상자를 만들었고, 제대로 잠기는지 봤어. 안에서 종이가 사람 이름으로 바뀔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건 있는 그대로 말하면 돼요.”
태수는 아들의 손에 들린 황동 열쇠를 보았다. 금속에는 자잘한 흠집이 있었다. 자신이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물건인데 낯설었다.
“우빈아. 예전 같으면 내가 대신 책임진다고 서명했을 거다.”
“저도 그랬어요.”
“근데 오늘은 그러면 안 될 것 같구나.”
서로 다른 세대의 두 사람이 같은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빈은 열쇠를 소라에게 넘기지 않았다. 도움을 받는 것과 책임을 대신 지우는 일이 얼마나 쉽게 혼동되는지 이제 알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금고의 표시창에 시간이 나타났다.
[2호 보존 장치 / 응답 시한 00:18:00]
[실물 인계 미확정 / 자동 대리 등록 절차 개시]
붉은 종이들이 사무실의 서류 틈에서 기어나왔다. 어머니 명숙의 이름, 오세림의 이름, 유종학의 이름이 각기 다른 종이 위에 찍혔다. 가장 마지막 종이에는 우빈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
‘한 사람만 골라 주세요.’
목소리는 아주 친절했다. 우빈은 한순간 명숙의 이름이 덜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름이 돋았다. 가족을 지키는 데 익숙해진 탓에 누군가를 자기 대신 서명하게 하려는 유혹을 또 받아들일 뻔한 것이다.
“고르지 않겠습니다.”
그는 각 문서가 당사자의 동의를 얻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현정이 준비한 이의 신청 자료를 제출했다. 소라는 207번이 사람 이름이 아니라 보관함 번호라는 자료를 첨부했다. 태수는 두 개의 홈이 있는 도면을 증거로 보탰다.
금고가 거칠게 떨렸다. 종이들이 인형의 팔처럼 연결돼 우빈의 목을 향해 뻗었다. 소라는 책상을 넘어온 첫 줄기를 종이 절단기로 끊었지만, 잘린 조각에도 이름이 남았다. 우빈은 절단기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동료들을 복도 쪽으로 물렸다.
“실제 받은 사람이 없다면 그 상태를 기록하면 됩니다!”
금고의 화면이 깜박였다.
[본인 확인 없이는 보류]
[자동 대리 등록 불가]
십팔 분이 다 지나기 전, 새로운 상태값이 떴다.
[207번 보관함 / 반출 뒤 미수령]
[관리자 임의 수령 확정 / 중지]
종이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우빈은 한동안 숨을 고른 뒤 현정에게 말했다.
“이건 푸른 금고를 되찾았다는 뜻은 아니죠?”
“맞아요. 불법적인 자동 확정 하나를 멈춘 거예요.”
그때 정태수의 낡은 도면 뒷면에서 또 다른 표기가 나타났다.
[207 / 최초 보류 대상: 사람 0명]
[내부 보존 내용: 삭제 명령을 거부한 1996년 원본 시험 기록]
우빈은 푸른 상자가 사람을 숨기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 이름을 지키기 위해 처음부터 기록을 숨긴 보관함일 가능성을 깨달았다.
제17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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