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0월 2일의 출입 기록은 종이에 없었다.
봉산 제0제작소의 남은 자료를 뒤지던 박현정은 경비실에 보관됐다는 카드 로그 목록을 발견했다. 하지만 실물 장부는 2004년 폐기됐고, 전산으로 옮긴 자료에는 그날의 기록만 누락돼 있었다.
“또 정확히 필요한 날만 없군요.” 김소라가 중얼거렸다.
정우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유를 모르잖아요. 전체 이관 중에 빠졌을 수도 있죠.”
“그렇게 말하는 건 좋지만, 우연만이라고 믿지는 않겠어요.”
소라는 그날의 수첩에 두 칸을 만들었다. 확인된 사실과 미확인된 의혹. 예전에는 그를 겁쟁이처럼 보이게 하던 구분이 이제는 서로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유종학의 옛 동료에게는 그날 오후 낯선 손님이 두 번 찾아왔다. 첫 번째는 회사의 과거 기록을 정리해 주겠다고 했고, 두 번째는 오세림이 어디 사는지 물었다. 둘 다 명함을 내밀었지만 회사 이름이 달랐다. 동료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왜 요즘 와서 오래된 일을 묻죠?”
상대는 이렇게 답했다고 했다.
“그분이 답을 안 하면 다른 사람 수백 명에게 불이익이 갑니다.”
그 협박은 우빈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었다. 한 사람의 침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을 낳는다고 꾸미는 방식. 그는 누군가를 설득해 대신 서명하게 만들던 자기 옛 모습을 떠올렸다.
현정은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연락 경로를 별도로 확보하고, 방문자의 명함 사진은 공개 자료에서 제외했다. 소라는 세림의 개인 정보를 찾는 사람과 세림의 진술을 확인하려는 사람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반복해 알렸다.
새벽에 도착했던 ‘저는 오세림입니다’라는 문자에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현정이 해당 번호의 사용자가 본인인지 확인할 수 있는 독립 경로를 문의했다. 몇 시간 뒤 법률 대리인을 통했다는 회신이 왔다. 오세림 본인이 지정한 연락 방식과, 외부에 공개해도 되는 진술 범위가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이번에는 기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먼저 조건을 정했네요.” 소라가 말했다.
대리인이 보내 온 첫 문장은 예상 밖이었다.
‘1996년 10월 2일 오세림은 푸른 외함을 수령하지 않았습니다.’
우빈은 화면을 다시 읽었다.
“그럼 아버지가 본 여자는 누구였죠?”
태수는 현정의 전화를 받고 곧장 도착했다. 우빈은 아버지에게 문장을 보여 주었다. 태수는 오랫동안 종이에 찍힌 푸른 줄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여자가 가져갔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실제로는 그 여자가 상자 옆에 서 있었고, 누군가 수레에 올렸어.”
“누가요?”
“기억 안 난다. 비를 피하려고 덮개를 씌운 것만 또렷해.”
그 말은 기존 진술을 뒤집는 것처럼 들렸지만, 우빈은 아버지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오래전 기억의 빈칸을 새로 메워 넣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대리인은 추가 설명을 보내 왔다. 오세림이 당시 확인하려 했던 건 실물 인수자가 아니라 장치의 작동 조건이었다. ‘확인하지 않으면 보류된다’고 계약서에 적혀 있는지, 관리자 임의로 내용을 바꾸지 못하는지를 검수했다고 했다.
그런데 푸른 외함은 정상 절차를 통과하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날 저는 장치가 누구에게 갔는지 몰랐습니다. 그걸 알아내려 했다는 이유로 오히려 반출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현정은 마지막 문장의 공개 범위를 다시 확인했다. 해당 진술은 보존 심사를 위해 사용할 수 있었지만, 오세림의 현재 주소나 직장, 가족 정보는 제공되지 않았다.
그날 오후, 우빈에게 메시지가 하나 왔다.
[2호 수취인 응답 시한: 28:16:03]
[당사자 무응답 / 대리인 응답은 수령 동의로 인정]
“아니죠.” 우빈이 말했다. “대리인은 오세림 씨가 수령하지 않았다고 전달했어요.”
그러자 화면의 글자가 꿈틀거렸다.
[수령 사실 부정 = 실물 회수 협조 의사]
금고는 부정하는 말조차 긍정으로 바꾸고 있었다.
그날 저녁, 현정이 공장 대표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제0제작소 별관의 지하 안전 진단 일정이 갑자기 앞당겨졌다는 소식이었다. 신청인은 현 소유자도, 건물 관리 업체도 아니었다.
[신청인: 백재헌]
대표는 분명히 말했다.
“저는 그런 사람한테 작업을 맡긴 적이 없습니다.”
별관 밖의 잠긴 철문에 붉은 표시가 찍혔다. ‘출입 승인 완료.’ 그러나 그 승인에 서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17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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